양동
동의 유래
100여년전까지도 갈대밭이었으나 日帝(일제)때 큰장이 서기 시작했고 축구장, 씨름판도 있었다. 큰 샘이 있어 "샘몰"이라 불렀으며 日帝(일제)때는 泉町(천정)이라 불렀다. 良洞(양동)이라 부른 것은 1946년 일제의 잔영을 없애기 위한 洞名을 바꿀 때부터이다.여러 직종의 드센 사람들이 모여사는 장터라는 지역적 특성에 착안하여 어질게 살라는 뜻으로 良洞이라 했다.
동의 연혁
1999 - 1961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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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18
양1동, 2동이 통합되어 양동으로 개칭
- 01. 18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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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01
법률 제4789호로 광주직할시를 광주광역시로 명칭변경
- 01. 01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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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01
법률 제3808호로 광주시가 광주광역시로 승격
- 11. 01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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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 01
區制(구제) 실시에 따라 남부출장소 관할이던 양1,2,3동은 서구 관할이 됨(대통령령 제6544호).
- 07. 01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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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 123구의 명칭을 양123동으로 고침(대통령령 제65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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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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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10
南部 출장소 관할이 됨(중부, 동부, 서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03. 10
1957 - 1914
-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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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02
본청 직할의 良1,2區가 됨. 122개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
- 12. 02
-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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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洞 1,2區가 됨. 洞會제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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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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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01
양동1, 2구 동회가 됨.
- 04. 01
-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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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 15
제1차 개정한 동명을 폐지하면서 町(정)을 街(가)와 洞(동)으로 바꿀 때 良洞으로 확정됨.
- 08. 15
-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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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05
일제의 잔영을 없애기 위해 잠정적 조치로 천정2구를 양동으로 바꿈(양동 호칭 개시)
- 04. 05
-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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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01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고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바뀔 때 광주부 泉町(천정)이 됨.
- 10. 01
-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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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01
법령, 규칙은 알수 없으나 邑승격에 앞서 通(통)里(리)의 명칭을 없애고 町(정)으로이름을 바꿀 때 일부 효천면 교사리에 합해지고 德臨(덕림)은 泉町(천정)이 됨.
- 04. 01
-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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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01
광주면 확장에 따라 효천면 교사리는 광주면 교사리가 됨.
- 04. 01
-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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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01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公수方面(공수방면)의 德林里(덕림리), 陶泉面(도천면)의 白雲里(백운리), 軍盆面(군분면)의 延禮里(연례리) 지역이 孝泉面 관할의 校社里(교사리)가 됨.
- 04. 01
조선후기
- 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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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역은 공수방면(公水方面)에 속했으며 당시 이곳 산기슭에 德林村(덕림촌) 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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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특징
- 불로동 하천변에 광주장이 섰으나 1910년대 光州橋下(광주교하) 백사장에 2일, 7일장이 들어서면서 광주큰장이라 불렀다.오일장으로 거래액이 연 7천만원이나 되어 전남 제일의 시장이 되었다.
- 1940년 4월 10일 양동 5번지에 새터를 잡아 1800여평, 634개 점포를 갖춰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2년에는 복개상가까지마련되어 더욱 장세가 커져 현재 광주·전남 최대의 상설시장이 되었다. 한일극장 주변 천변로에는 400여개의기계공구 상가들이 모여 있으며 1997. 4. 1 양동 60-37번지에 호남최대의 금호생명 빌딩이 준공되어 많은 업체가 입주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