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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1경만귀정
-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 지정번호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 지정연도 : 1984년 2월 29일
- 소재지 : 광주 서구 동하길 10 ( 세하동 )
- 소유자 : 흥성장씨 문중
- 시 대 : 조선시대
- 규 모 : 정면2칸, 측면 2칸, 팔작지붕
- 분 류 : 누(정)각
- 구 성 :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유래
전북 남원에 살던 효우당(孝友堂) 장창우가 광주 서구 동하에 이거한 후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었다. 정자의 명칭에 대한 유래로는 효우당(孝友堂)이 그의 늙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으로 해석된다.
1934년 중건을 시작하여, 광복이 되던 45년에 현재의 정면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완성하였다.
- 만귀정시문화재자료 5호로 지정되었으며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당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서로의 흥취를 돋은 곳으로 유명하다.
- 습향각만귀정 계단을 내려와 연못의 다리를 건너면 습향각이 있는데 이곳은 1940년에 효우당 7세손 묵암 장안섭이 지었는데 사방 1칸의 팔각지붕 으로 주위의 연꽃 향기가 엄습하여 온다는 뜻의 이름이다.
- 묵암정사만귀 선생의 후손인 정안섭 송정읍장의 공로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60년 광산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역사
- 흥성장씨의 선조인 효우당 장창우가 조선조 현종 12년(1671년)에 현 만귀정 자리에 터를 잡고 연못을 팠으며 그 판 흙으로 동산을 만들고 수중에 서당을 세운것이 시초인 듯하다.
- 후에 이곳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 흥성장씨의 후손들이 만귀 장창우가 후학을 가르쳤던 옛터에 그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1934년에 중건하였고 그 후 1945년에 중수하였다.
- 일제강점기 기간에는 “만귀정시회”라는 선비들의 모임이 있어 풍류와 오락을 즐기는 시인묵객들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변천사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조경학과 정동오 교수에 의하면 만귀정 지연은 원래 주변의 논에 물을 대어줄 목적으로 만든 인공 저수지에다 섬과 동산을 만들고 정자를 세운데서 출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논 사이에 끼어 있는 못은 전통적인 방지가 아닌 부정형 적인 D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는 하나 중도를 넣어서 3개의 섬으 로 이루어진것은 전통적인 신선사상양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논 사이에 끼어 있는 못은 전통적인 방지가 아닌 부정형 적인 D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는 하나 중도를 넣어서 3개의 섬으 로 이루어진것은 전통적인 신선사상양식으로 볼 수 있다.
만귀정 이모저모
동네 주민들은 이곳은 광주사람들의 유원지(소풍장소)로써는 절대지소였으며,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졌고, 여름이면 창포꽃이 땅바닥을 뒤덮었고, 가을이면 연못가에 붉게 물든 상사화가 군락을 이루었으며, 신성일, 윤정희, 허장강 등 명스타들이 출연했던 영화 ‘꽃상여’,‘탈선 춘향전’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자랑한다.
현판 및 관련자료
- 3개의 정자에는 만귀정중건상량문(晩歸亭重建上樑文), 중건기, 중수기 등과 만귀정원운(晩歸亭原韻)과 팔경(八景)등 많은 시문과 현판들이 걸려 있으며 경내에는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晩歸亭詩社創立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 들어갈 때는 취하고 나올때는 깨라.
만귀정 옆 좌우로 두개의 긴 석재에 ‘성석’(醒石)과 ‘취석’(醉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들어갈 때는 취하고, 나올 때는 깨어나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만귀정에 걸려 있는 장창우 선생의 詩 팔경(八景)
瑞石明月-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용강에는 어부들의 불빛이 있네
馬山淸風-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낙포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가네
漁燈暮雲-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
錦城落照-금성에는 아름다운 저녁노을野外長江-들밖에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