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적
서 설 < 序 說 >
옛부터 선비 知識人(지식인)들이 亂世(난세)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두 가지 길이 있다. 徹底(철저)하게 卑屈(비굴)하여 良心(양심)과 志操(지조)를 一身(일신)의 塋達(영달)과 맞바꾸는 偸安(투안)에 빠지던가 이니면 志節(지절)을 굳게 지키고 없는 듯 숨어사는 隱遁(은둔)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고장 光州(광주)의 많은 韓末學者(한말학자)들은 그 대개가 日帝(일제)의 恢柔(회유)에 굽히지 않는 傲霜(오상)의 굳은 志慨(지개)를 간직한채 「學不厭(학불염), 敎不倦(교블권)」의 착하고 어진 生涯(생애)를 살았으며 그들이 길러낸 많은 인재들이 지금 이 나라 이 지방의 發展(발전)에 貢獻(공헌)을 하고 있다.
그들 先人(선인)들의 義(의)롭고 바른 行德(행덕)은 바로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손에닿는」義表(의표)이자 값진 龜鑑(귀감)이기에 그 玲瓏(염롱)하고 어진 貴像(귀상)에 불빛을 비춰보기로 한다.
고광선 < 高光善 >
長興人(장흥인), 號(호)는 弦窩9현와)이며 1855년 구 大村(대촌)관내 앞 촌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한고향의 巨儒(거유) 德岩(덕암) 羅燾圭(나도규)에게 글을 배웠고 장성한 뒤에는 蘆沙(노사) 奇正鎭(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이 자못 大成(대성)하였다.
그 뒤에 국운이 기울자 이를 통분히 여겨 入山遁居(입산둔거)하여 白帽韋布(백모위포)를 師門(사문)의 標識(표식)로 삼고 글과 道義(도의)를 펴는데 專念(전념)하니 사방에서 모여드는 제자들이 수 백 명에 이르렀다. 그가 서거한 후 이 고장의 유림들과 제자들이 모은 誠金(성금)으로 「鳳山詞(봉산사)」라는 詞宇(사우)를 세워 해마다 제향을 지낸다.
최석규 < 崔錫圭 >
耽津人(탐진인) 號(호)는 野隱(야은), 1902년 구 서창면 마륵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學究(학구)와 實踐(실천)을 겸한 학자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數百第子(수백제자)의 學(훈학)에 全力(전력)하였고 마을 어귀에 頌德碑(송덕비)가 서있다.
박장주 < 朴璋柱 >
本貫(본관)은 忠州(충주), 號(호)는 弘海(홍해)이며 1885년 구 서창면 주곡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글을 松沙(송사) 奇禹萬(기우만)에게 배워 당대에 文章(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많은 遺稿(유고)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