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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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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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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선 < 高光善 >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은 본관이 장흥이며, 자는 원여(元汝), 호는 현와(弦窩)이다. 복헌 고정도(高廷憲)의 후손이며, 부친은 고박주(高璞柱)이다. 그는 광주목 유등곡면 압보촌, 오늘날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복촌에서 태어났다.

1862,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서책의 암송과 독서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1864, 모친상을 당하자, 어린 동생을 돌보는 한편 계모인 광산김씨를 친모처럼 극진히 섬겨 사람들로부터 깊은 칭송을 받았다.

그해 열 살이 된 그는 덕암 나도규(德巖 羅燾圭)의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하며 제자백가의 학문을 섭렵하고 유학의 대의를 깨우쳤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혼란한 세태를 깊이 우려하며 기정진(奇正鎭)과 뜻을 함께해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분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1905,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며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서창면 봉산(오늘날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으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1906년에 광주군 갑마보면, 즉 오늘날의 서구 용두동에 엄이재(掩耳齋)를 짓고 은거하였다. ‘엄이는 귀를 막고 세상의 잡음을 듣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이 담겨 있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그는 백의백립(白衣白笠)의 옷차림으로 북쪽을 향해 통곡한 뒤 다시 엄이재로 돌아가 칩거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덕을 좇는 수많은 후학들이 끊임없이 찾아오자, 1919년 엄이재 옆에 봉산정사(鳳山精舍)를 건립하고 본격적으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1918년 고종 황제가 붕어하자, 그는 엄이재 북쪽 바위에서 북향하여 통곡하였다 하며, 이 바위를 후인들은 읍궁암(泣弓巖)이라 불렀다.

19341225, 이질(痢疾)로 몸이 불편함에도 이른 아침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자손들이 본가로 옮기려는 뜻을 사양하고 봉산정사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향년 80세였다.

선생의 유고는 현와유고(弦窩遺稿)라는 이름으로 168책의 석판본으로 남아 있다. 이 문집에는 시 247, 1,439편 등 총 1,686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 (), 비명(碑銘), 행장(行狀), (), 발문(), 잡저(雜著) 등 다양한 형식의 문장들이 포괄되어 있다. 1956년에는 장성에서 94책의 목활자본이 간행되었고, 1962년에는 168책의 석인본으로 재간행되었다.

최석규 < 崔錫圭 >

최석규(崔錫圭, 1902~?)는 본관이 탐진(耽津), 호는 야은(野隱)이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 수난의 시기에 광주 서창 지역을 중심으로 문해교육과 전통문화 계승에 헌신한 인물이다.

당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민족 정체성마저 탄압당하던 상황 속에서도 그는 굳센 의지로 서당을 설립하였다.

최석규는 서창 지역의 마지막 훈장으로 불리며, 서창은 물론 인근 마을의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고 바른 삶의 길을 열어 주었다.

세월이 흐른 1977년 그의 제자들은 선생의 가르침과 은혜를 기리기 위해 은사 야은 최공석규 공적비(恩師 野隱 崔公錫圭 功績碑)’를 세웠다. 비문은 제자들이 짓고, 글씨는 이용구(李容九)가 썼다. 이 비석은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원마륵211, 마륵동 노인회관 인근 원마륵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박장주 < 朴璋柱 >

박장주(朴璋柱, 1885~?)는 본관이 충주, 호는 홍해(弘海)이다. 광주 서창 주곡마을에서 태어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역 유학과 문학의 맥을 이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호남의 유학자이자 명망 높은 학자였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문과 문장을 갈고닦았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생애 후반에는 자신의 시문을 정리한 유고를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유고를 찾을 길이 없다.

박장주는 서창 주곡마을에 위치한 만귀정(晩歸亭)을 중심으로만귀정시사(晩歸亭詩社)’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 시사는 문학모임으로, 지역 선비들이 모여 시와 문장을 나누며 교유하고 정신을 수양했던 공동체이다.

만귀정 정자 경내에 세워진 만귀정 시사 창립기념비는 바로 박장주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시사 모임의 발자취를 기념하는 비석이다. 글은 송광세(宋光世)가 지었다. 민족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내려 했던 조선 후기-근대기의 향촌 지식인 문화운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