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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문화유적

서 설 < 序 說 >

815해방 후, 많은 사람들이 日本(일본)의 우리나라 强占統治(강점통치) 36년에 憤激(분격)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되려 甚(심)한 懷疑(회의)를 느낀다. 그 가운데 우리 抗日愛國志士(항일애국지사)들의 목숨을 건 凄絶(처절)한 鬪爭(투쟁)에 嚬蹙(빈축)을 보내고 대문을 닫아건 앙悖(패)의 非情(비정)은 없었던가?

우리 民族(민족)이 한 덩어리가 되어 日本(일본)의 侵略(침략)에 끝까지 對抗(대항)을 했던덜...... 아니 설사 거기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에 同調(동조)하고 附和(부화)하지만 않았던들 그토록 일본의 暴壓政治(폭압정치)가 악랄하고 오래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여기에 뼈저린 自責(자책)과 反省(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 어느 때고 우리에게 가장 경계하고 排斥(배척)되어야 할 일은 自己自身(자기자신)은 편안히 살면서 자기 以外(이외)의 他人(타인)이 이 나라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얌체스러운 依他心(의타심)」바로 그것이며 그보다도 더 唾(타)락되고 憎惡(증오)할 일은 他人(타인)이 하는 愛國(애국)과 正義(정의)에의 투쟁까지를 비웃고 협기하는 所行(소행)인 것이다. 우리는 그 같은 관점에서 그 어느 때 어떤 경우보다도 韓末義兵(한말의병)과 抗日獨立鬪士(항일독립투사)의 처지를 悲痛(비통)히 여기며 그러기에 더욱 값진 것으로 생각한다.

壬辰倭亂(임진왜란)때의 倡義(창의)들에게는 다만 來侵(래침)한 者(자)〈倭(왜)〉가 敵(적)이었고 同族(동족)은 모두가 내편이었다. 그래서 護國(호국)의 一念(일념)이면 그것만 가지고도 보람을 찾고 떨쳐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러나 韓末義兵(한말의병)은 日本官憲(일본관현)들만 상대로 하는 抗爭(항쟁)이 아니고 그들과 合勢(합세)한 우리同族(동족)(王師(왕사)를 자칭한 官軍(관군))과도 맞서야 하는 통분하고 쓰라린 처지에 있었다.

身命(신명)을 내던진 「피의 忠節(충절)」에도 그 功(공)을 알아주는 組國(조국)도 民族(민족)도 없는 서럽고 외로운 투쟁. 오직 숭고한 救國(구국)의 一念(일념)과 義氣(의기)의 噴出(분출)을 눌러 참고 앉아 있을 수 없어 民族魂(민족혼)의 명령에 따라 이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걸고 그 「孤憤(고분)의 抗爭(항쟁)」에 떨쳐나선 것이다.

韓末義兵(한말의병)의 先鞭(선편) 毅岩(의암) 柳麟錫(유린석)은 起兵後(기병후) 王(왕)에게 올린 상소문에 「臣(신)의 무리들은 능히 곰의 발바닥과 생선의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가려야 할 줄을 압니다.」라고 적었다. 이 말은 「곰의 발바닥」과 생선이 다같이 맛있는 줄은 알지만 만약 그 중에서 擇一(택일)하라면 더 맛있는 「熊掌(웅징)」을 고르듯이 사람에게 있어서 生命(생명)과 正義(정의)가 다같이 重要(중요)한 것인 줄은 알지만 굳이 두 가지 중하나를 택하라면 차라리 生命(생명)을 버리고 正義(정의)를 고르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한마디 짧은글에서 韓末倡義(한말창의)들의 指向(지향)과 性格(성격) 價値觀(가치관)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양진여 < 梁振汝 (1860~1910) >

號(호)는 瑞菴(서암) 濟州人(제주인) 선비 梁南中(양남중)의 長男(장남)으로 舊光州郡(구광주군) 泥洞(니동)마을에서 태어났다. 天性(천성)이 꿋꿋하고 志節(지절)이 있어 한말에 국운이 기울자 울분을 참지 못해 담양군 대전면 三人山(삼인산) 뒷편에 風征庵(풍장임)을 세우고 많은 제자를 모아 글과 兵書(병서)를 가르켰다.

1904년 2월 23일 韓日義定書(한일의정서)가 강제 조인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각처에 주막을 두고 군자금을 마련한 후 격문을 뿌려 300여 의병을 모집하여 1907년 9월초부터 순창, 고창, 담양,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장성 非峙(비치)전투에서는 왜군 대군에게 포위되어 막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담양 남면 전투에서는 왜장 「요시다」죽였고 1908년 11월 광주 수비대를 섬멸할 목적으로 각지 의병장에게 지원병을 요청, 이들 부대와 연합전선을 펴서 12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의병 증모와 군자금조달을 위하여 각지방을 순회하던 중 왜병 밀정의 정보제공으로 의병들의 활동에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1909년 8월 왜가 2200여명의 대병력을 호남에 투입 소위「南韓大討伐作戰(남한 대토벌작전)」을 전개할 때 총상을 입고 치료 중 8월25일 왜장 「가지무라」가 이끄는 40여명의 偵察隊(정찰대)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어 1910년 5월30일 大邱刑務所(대구형무소)에서 刑死(형사)하였다. 해방 후 「建國勳章國民章(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양상기 < 梁相基 >

호는 雪竹(설죽) 義兵將(의병장) 梁振汝(양진여)의 長男(장남)으로 1883년 10월 10일 出生(출생)하였다. 성품이 至孝伉俠(지효항협)하여 부친이 세운 風征庵(풍정암)에서 글을 배우고 武藝(무예)를 닦았다.

왜적타도를 목적으로 왜경에 위장 침투한 그는 아버지 梁振汝(양진여)에게 총기를 감추어보내고 기밀을 탐지 제공해 오다가 그 정체가 탈로되자 재빨리 그곳을 탈출하여 아버지 휘하에 들어가 의병의 政訓(정훈)을 담당하였고 그 뒤 광주, 창평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獨立(독립)부대를 창설하였다.

이 부대는 全海山(전해산), 梁振汝(양진여)부대와 합류 담양대치에서 적과 12일간에 걸쳐 전투를 벌여 대승 했으나 1909년 3월 한인밀정꾼의 밀고로 적의 급습을 받아 옥과 창평 등지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는데 그들 밀정들을 모조리 붙잡아 죽이고 동복, 창평, 옥과 등지의 헌병 분주소와 담양 수비대를 습격하여 많은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1909년 8월 소위 南韓大討伐(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인하여 부친 梁振汝(양진여)가 체포된 4개월 후인 1909년 12월 29일 밤 남원에서 붙잡혀 1910년 5월 17일 대구형무소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다. 광복 후 建國褒章(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김원국 < 金元國 >

本名(본명)은 昌燮(창섭)으로 1874년 구서창면 北村(북촌)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천품이 호탕하고 氣節(기절)이 꿋꿋하여 한말의 잇따른 국치사건에 분개하여 동생 金元範(김원범)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1907년 12월 부하 300명을 거느리고 金泰元軍(김태원군)과 합세하여 왜병과 싸워 적 40여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며, 1908년에는 광주주둔수비대 吉田(길전)부대와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고, 그 뒤 광산, 나주, 능주, 동복, 영광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였다.

1909년 1월 金泰元(김태원), 曺京煥(조경환) 두 의병장이 순절하자 그 뒤를 이어 5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호남각지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1909년 4월 林谷(림곡)에서 왜병과 격전 중 부상을 입고 요양하던 중 그 해 6월 15일 왜병에게 체포되어 36세를 일기로 대구형무소에서 形死(형사)하였다. 광복후 建國功勞勳章(건국공노훈장)을 추서 받았다.

김원범 < 金元範 >

義兵裝(의병장) 金元國(김원국)의 아우로 曺京煥(조경환)휘하와 全海山(전해산)부대에서 활약 중 1909년 1월 어등 산에서 왜병과 교전하다가 붙잡혀 취조 중 혀를 끊고 자결하였다. 광복 후 1963년에 「國民章(국민장)」이 추서 되었다.

김홍두 < 金弘斗 >

아호는 樂浦(락포)이며 1879년 구 서창면 학동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글을 松沙(송사)奇宇萬(기우만)에게서 배운 그는 남달리 애국심이 가했으며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3년 慶北(경북) 豊基(풍기)에서 蔡祺中(채기중), 韓焄(한훈), 柳璋烈(유장열)등과 大韓 光復團(대한광복단)을 조직 암약하다가 1918년 왜경에서 탐지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해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上海臨時政府(상해임시정부)의 密令(밀령)을 띠고 국내로 潛入(잠입) 서창면 학동 本家(본가)에 근거를 두고 군자금조달과 국내 각지의 靑年會(청년회) 조직정비를 위해 활동 중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나주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不屈(불굴)하고 스스로 혀를 깨물고 함구하니 一審(일심)에서 징역 5年(년)을 선고받고 抗訴(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朴尙鎭(박상진((死形(사형)), 安在鴻(안재홍), 玄益拮(현익길), 李起選(이기선), 奇山度(기산도) 등과 같은 감방에서 刑期(형기)를 마쳤다.

출감 후 1926년에 다시 全南北(전남북)의 同志(동지)를 규합하여 抗日(항일) 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그 당시 고등계 형사인 徐承烈(서승열)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1933년 6월9일 55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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