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양진여 < 梁振汝 (1860~1910) >
양진여(梁振汝, 1862~1910) 의병장은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 오늘날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498-1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비 양남중(梁南中)이며, 본관은 제주, 자는 진여(振汝), 호는 서암(瑞菴)이다.
그는 장성군 불태산의 정이암(鄭李庵)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국운이 쇠락하던 대한제국 말기에는 담양군 대전면 삼인산 자락에 풍정암(風征庵)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자 거병을 결심하고, 부인 박순덕(밀양 박씨) 여사와 함께 주막을 운영하며 의병 활동의 자금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이때 인근 10여 개 고을에 주막을 설치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자금을 조달한 일은 주로 부인의 몫이었다.
1905년에는 맏아들 양상기(梁相基)를 대한제국의 진위대에 입대시켜 무력 항거의 길을 대비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과 함께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양진여는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10월경 3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광주, 담양, 창평 일대를 거점으로 본격적인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양진여의 의병부대는 독자적인 전투는 물론, 전해산, 강판열 등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펼치며 일본군에 맞섰다. 장성 비치(非峙) 전투에서는 일본군 대군에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담양 남면 전투에서는 왜장 요시다(吉田)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0월 23일에는 담양에서 일본 기병 2명을 기습하여 처단하였으며, 26일에는 일본군 헌병과 순사로 구성된 '폭도토벌대'를 광주 송정읍 신촌리에서 격퇴하였다.
같은 해 11월 25일, 담양 추월산에 주둔 중이던 그의 부대는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화력의 열세로 아군 1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1909년 2월, 연합 의병진이 새롭게 구성되었을 때 그는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부상으로 활약은 제한적이었다. 이후 그의 부대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일부는 아들 양상기의 부대에, 일부는 다른 독립부대에 흡수되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해 8월, 일제는 호남 전역에 2,200여 명 규모의 대토벌군을 투입하였고, 양진여는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에 은신 중 일본 정찰대 40여 명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었고, 고등법원까지 상고했으나 1910년 4월 13일 최종 기각되었다. 같은 해 5월 30일, 대구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아들 양상기와 함께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 151-9번지, 백마산 기슭에 안장되어 있다.
또한 광주시는 그의 호를 따 ‘서암대로’를 명명하였다. 이 도로는 북구 동운고가에서 시작하여 운암동, 신안동, 중흥동, 계림동을 지나 서방사거리까지 3.2km에 이르는 길이다.
양상기 < 梁相基 >
양상기(梁相基, 1883~1910) 의병장은 광주군 서양면 니동리, 현재의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호는 설죽(雪竹)이며, 호남 의병장 양진여(梁振汝)의 장남이다.
그는 유년기부터 풍암정에서 병서(兵書)를 읽으며 무예를 익혔고, 20대에는 대한제국 진위대에서 복무하며 군사적 기반을 다졌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광주경찰서에 순사로 잠시 근무하게 된다.
1908년 4월 23일, 아버지의 의병장 활동이 알려지며 순사직에서 면직된 그는 그 길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같은 해 5월, 독자적으로 거병한 그는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최대 80여 명에 이르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대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양상기 부대는 도통장 안판구, 후군장 이문거, 포군장 안영숙, 도선봉장 조사윤, 참모장 유병기 등으로 편제되었으며, 주로 화승총 등으로 무장하였다. 평민 중심의 구식 군인 출신들이 참여한 부대였고,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 이후 그 잔여 병력을 흡수하여 세를 확장하였다.
그는 ‘한국의 복구’를 목표로, 군자금 모집, 일진회원 및 밀정 처단, 일제 헌병분견소 공격과 방화 등 다양한 항일 활동을 벌였다. 1908년 11월에는 아버지 양진여 의병부대와 연합해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광주수비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하지만 1909년 4월 동복 서촌 전투에서는 1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같은 해 5월 담양 덕곡리 전투에서는 23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전투력의 열세뿐 아니라, 밀정의 밀고로 인해 일제 토벌대의 기습을 당한 결과였다.
그해 12월, 양상기 의병장은 남원 도통리에서 은거 중 체포되었고,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강도·방화·살인 등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으나 같은 해 5월 17일 동일한 형을 다시 선고받았고, 최종 판결 후 8월 1일, 부친 양진여 의병장이 순국한 지 두 달 만에 같은 대구감옥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사형 직전 "살아서 영광 있고 죽어서 애달프니, 몸은 비록 죽었어도 명성이 남았도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광복 이후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묘소는 부친 양진여 의병장과 함께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151-9번지, 백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의 호를 딴 ‘설죽로’는 부친의 이름을 딴 ‘서암대로’에서 시작된다. 설죽로는 신안1교에서 출발하여 임동, 신안동, 오치동, 용봉동, 매곡동, 일곡동 등 북구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6.6km 구간에 이른다.
김원국 < 金元國 >
김원국(金元國, 1870~1910) 의병장은 본명 창섭(昌燮), 호는 석포(石浦)이며, 1873년 광주 서창 북촌(北村) 마을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기개가 강건하여, 한말의 국권 침탈 사건들이 잇따르자 분연히 일어나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1905년 9월, 김원국은 광주 송정리 시장에서 일본 군인을 타살하고 피신한 뒤,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 3월, 동생 김원범(金元範)과 함께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3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 전투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혀 목포로 압송되던 중 탈출에 성공하여 함평 먹굴산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김원범이 조경환 의병진에서 도포장(都砲將)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진영에 합류하였으며,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창평 무동촌에서 매복 중 일본 헌병대와 접전을 벌여 적장 요시다(吉田)를 포함한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고, 장성 낭월산에서도 격전을 치렀다. 그해 3월, 영광 토산 전투에서 패한 후 불갑산으로 퇴각하였고,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는 참패를 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1908년 12월, 어등산에서 동생 김원범이 일제의 기습으로 포로가 되었고, 이듬해인 1909년 2월 취조 도중 자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원국은 격문을 돌려 동지를 다시 규합하고, 독자적으로 의병장이 되어 항쟁에 나섰다.
그는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맞서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며, 함평을 거점 삼아 광주, 나주, 능주, 동복, 창평, 담양, 장성, 영광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나주 관동에서는 일본군 4명을 사살하고, 함평 오산면에서도 격전을 벌이는 등 탁월한 전과를 남겼다.
그러나 잇단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군 지휘권을 곽진일(郭鎭一)에게 위임하고, 광주 우산면 향악리에서 병을 치료하던 중 1909년 6월 일제에 체포되었다. 광주감옥에서 수감 중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고, 그해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그의 숭고한 항일정신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원범 < 金元範 >
김원범(金元範, 1886~1909)은 광주 서창 북촌 마을 출신으로, 13살 연상인 형 김원국(金元國) 의병장과 함께 호남의병운동의 한가운데를 지켰던 청년 의병장이었다.
1906년, 김원범은 형과 함께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접전을 벌였으며,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들은 강한 결속력과 지형을 활용한 전술로 일본군을 유인하고 타격하는 유격전의 명수로 평가받았다.
1907년에는 호남창의회맹소를 중심으로 기삼연(奇参衍)과 김준(金準) 등이 일으킨 거의(擧義)에 동참하였고, 김준 휘하에서 장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광주수비대와의 교전에서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며 호남의병의 위상을 높였다.
1908년 1월에는 김태원 의병장과 함께 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봄 무렵에는 기삼연과 김준이 잇따라 순국하자 전열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각 부장들이 독립적으로 의병장을 칭하는 상황 속에서 김원범은 전해산(全海山) 휘하의 중군장이 되었다가 다시 조경환(曺京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피신 중이던 형 김원국이 광주 선암시장(仙岩市場)에서 조경환을 만나 동생의 소식을 듣고 그 부대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형은 선봉장으로, 김원범은 도포장(都砲將)으로 각각 활약하였다.
김원범은 1908년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토산, 함평 오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계속 교전하였다. 이 시기 김원국이 광주 일대에서 의병 토벌의 주역으로 알려진 일본군 장교 요시다(吉田)를 사살한 전투에도 김원범이 함께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9월에는 영광 황량면 출신의 일제 밀정 변영서(邊永瑞)를 함평 식지면 군평리에서 부하 20명과 함께 생포하여 총살하는 등 적극적인 처단전도 펼쳤다. 이는 전해산의 명에 따른 것으로, 당시 호남 의병장 간의 유기적인 작전 체계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09년 1월, 조경환 의병장이 전사하자 김원범은 다시 전해산과 연합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고 전해산을 대장으로, 자신은 중군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광주, 나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형 김원국과 함께 항일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 전투 중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 혹독한 고문과 취조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던 그는, 같은 해 9월 2일, 자신의 혀를 스스로 끊고 23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애국정신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홍두 < 金弘斗 >
김홍두(金弘斗, 1879~1933)의 본관은 김해이며, 아호는 악포(樂浦)이다. 광주 서창면 용두리 155번지, 학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향리에서 한학을 익혔고, 성년이 되어 송사 기우만(奇宇萬)에게 성리학을 배우며 남다른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3년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蔡祺中), 한훈(韓焄), 유장열(柳璋烈)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이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 양제안(梁濟安), 우재룡(禹在龍) 등과 합류하면서 광복회로 개칭하였다.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 김좌진(金佐鎭), 윤홍중(尹洪重), 신두현(申斗鉉), 김정호(金鼎浩), 윤치성(尹致晟), 이현(李鉉), 박성태(朴性泰), 기명섭(奇明燮)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다시 광복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일제 경찰의 감시망이 날로 조여오자 김홍두는 1918년 상해와 남경 등지로 망명하여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1920년 7월 상해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등 임정 요인들과 회동하고, 군자금 모집과 조직 재건을 위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고향 서창 학동을 거점으로 전국 청년회 조직과 군자금 조달 활동을 펼치다가 전남 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입을 다문 채 끝내 저항하였고, 1920년 11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항소 끝에 1921년 3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으로 감형되었다.
출옥 이후에도 1926년 전남과 전북에서 동지들과 재차 항일운동을 조직하던 중 장성경찰서에 체포되어 3개월 간 수감되었다. 당시 고등계 형사 서승열의 은밀한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나, 수차례 고문의 여독으로 인해 결국 1933년 6월 9일, 향년 5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의 고향인 광주 서구 용두동 163-4번지에는 1992년 공적비가 거북이 모양의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이기전이 짓고 직접 휘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