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김성도 < 金成道(1651∼1714) >
김성도(金成道, 1651~1714)는 본관이 김해(金海)로,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곁에서 성장하면서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그는 인분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는 상분진병(賞糞診病)을 행하였고,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아버지께 드리는 단지진혈(斷指進血)의 극진한 효도를 실천하였다.
부친이 끝내 세상을 떠나자, 김성도는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겨울철 눈과 얼음이 가득한 엄동설한에도 매일 인근 샘터에 나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며 정성을 다하니,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 샘을 ‘효자천(孝子泉)’이라 불렀다.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사림들의 추천을 받아 1878년(고종 15년)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으며,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또한 광주 우산동에는 그의 효심을 기려 효자정려(孝子旌閭)가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김성도 효자정려 또는 효자천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확인이 어렵다.
이태의 < 李泰儀 >
이태의(李泰儀, 1890~?)는 본관이 김해(金海)로, 광주 금호리(金湖里)에서 태어났다. 평소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정성을 다했다.
그는 무등산 위에 제단을 쌓고 날마다 지극한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 효심을 실천하였고, 이러한 효행이 널리 알려져 당시 사장관(四長官)의 표창을 받았다. ‘사장관’은 당시 지방 관청의 장관급 인사 4인이 공동으로 표창한 사례로, 지역 유림의 추천과 조선 말기 ~ 일제 강점기 향촌 사회의 도덕 선양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어귀에는 ‘효자비(孝子碑)’가 세워졌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알 수 없다.
김명록·김영태부자 < 金明錄·金永泰父子 >
김명록(金明錄)과 그의 아들 김영태(金永泰)는 본관이 광산으로, 광주 서창면 운리(雲里) 마을 출신이다.
부친 김명록은 어린 시절에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남은 계모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아들 노릇을 하며 극진히 봉양하였다. 계모가 위독해지자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는 단지진혈(斷指進血)의 효행을 실천하였으나 병세는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 그는 계모의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아들 김영태 또한 아버지의 효행을 본받아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명록이 세상을 떠나자,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3년 동안 빠짐없이 성묘를 다녔으며, 그 정성과 태도가 주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이렇듯 부자가 나란히 효행을 실천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정으로부터 부자(父子) 모두 포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청주한씨 < 淸州韓氏(1551∼1592) >
청주한씨(淸州韓氏, 1551~1592)는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삽봉 김세근(金世斤)의 부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군 김세근은 의병을 일으켜 전장에 나갔고, 충청도 금산군 와평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청주한씨는 큰 충격을 받았으나, 몸소 절의를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시동생 김수근(金壽斤), 아들 김추남(金秋男)과 함께 남편의 유해를 찾기 위해 금산으로 갔으나 끝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이에 초혼(招魂)을 행하여 남편의 혼을 불러 선영 아래에 장사지낸 뒤, 다음 날 단호히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자결에 앞서 “부군은 충을 다해 죽고, 나는 열로서 따른다. 이것이 사람됨의 근본이다(夫死忠하고 婦死烈은 人之本이라)”는 말을 남기고, 부군이 전장에 나설 때 남겨준 단검으로 자결하였다.
순창조씨 < 淳昌趙氏(1553∼1597) >
순창조씨(淳昌趙氏, 1553~1597)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이자 학자였던 광주 서창동 절골마을 출신 김극추(金克秋)의 아내이다.
전란이 한창이던 시기, 부군 김극추가 전장에 나가 왜군과 싸우는 동안 적군이 집안까지 침입하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순창조씨는 왜적의 면전에서 자신의 배를 스스로 찔러 자결하였고, 그녀의 단호한 행동은 왜적조차도 감복하게 만들었다. 이에 적은 그녀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며 그 문 앞에 그녀의 열행을 기리는 표식을 남기고 다시는 침입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숭고한 절행은 후대에까지 전해졌으며, 1891년(고종 28년) 조정에서는 그녀에게 ‘숙부인(淑夫人)’의 품계를 내렸고, 후에 김극추는 좌승지로 중직정려를 명하여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삼강정려에 모셔졌으나 주택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이설되었다.
김해김씨 < 金海金氏 >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의 후손인 김복태(金福泰)의 부인이다.
그녀는 평소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깊은 칭송을 받아왔다. 남편 김복태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허벅살을 베어 피를 먹이는 ‘할고주혈(割股主血)’의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끝내 세상을 떠나자, 자신 또한 목을 매어 따라 죽는 ‘하종(下從)’의 절의를 실천하였다.
그녀의 숭고한 열행(烈行)은 지역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었고, 이를 기려 마을 어귀에 ‘열부각(烈婦閣)’이 세워졌다. 이후 열부각은 나주로 이전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매년 음력 10월 17일에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는 제향(香華)이 이어지고 있다. 후손들과 지역 주민들은 해마다 이 제향을 통해 그녀의 절의와 희생을 기리고 있다.
고사순 < 高士順 >
고사순(高士順)은 본관이 장흥(長興)으로, 1911년 광주 서창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평소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지역에서 널리 칭송을 받았다. 그의 효행은 단지 가정 내의 미덕에 그치지 않고, 마을 공동체 모두가 감동할 만큼 깊고도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의 효행은 인정받아 1984년 광주유도회로부터 공식적으로 효행 표창을 받았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성금을 마련하고, 마을 어귀에 ‘효열비(孝烈碑)’를 세웠다.
송희순 < 宋喜順 >
송희순(宋喜順, 1938~?)은 본관이 홍주(洪州)로, 부친은 송행진(宋幸鎭)이며, 장흥 고씨(長興 高氏) 가문의 고욱주(高旭柱)와 혼인하였다. 광주 서창면에서 태어나, 평생을 단정한 행실과 덕망 있는 삶으로 이웃과 지역사회로부터 깊은 칭송을 받아왔다.
혼인 후에는 전통 유교 윤리에 따라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특히 시모가 오랜 기간 병환으로 누웠을 때, 무려 10년에 걸쳐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간병하며 효행을 실천하였다. 시모가 별세한 이후에도 상례를 엄숙히 치렀고(遵禮至喪), 홀로 남은 시부를 지극한 정성으로 생애 끝까지 공경하며 섬겼다.
이러한 그녀의 효행은 지역사회 전체에 널리 알려졌으며, 주민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효의 표상’으로 회자되었다. 이에 광주향교에서는 송희순 여사의 효행을 높이 평가하여 공식 표창하였고, 마을 주민들은 그녀의 고귀한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마을 어귀에 ‘효행비’를 세웠다.
김덕례 < 金德禮 >
김덕례(金德禮)는 광주 서창면 용두리에 거주하였으며, 본관은 강릉(江陵)으로, 유재일(劉載日)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남편이 병으로 위독에 이르자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에 임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편은 그녀가 스물네 살이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죽음을 맞은 그녀는 태중의 아이와 늙은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따라 죽고자 했던 마음을 거두었다. 이후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남은 생애를 시모 봉양과 자식 양육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평생을 수절(守節)하며 정절을 지켰고, 시모에 대한 효성 또한 극진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열행(烈行)은 가정 안팎은 물론 지역 사회 유림들 사이에서도 깊은 존경을 받았고, 그 공덕이 널리 알려져 유림계 3개 단체의 단체장으로부터 ‘효열 표창’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광임 < 李光任 >
이광임(李光任)은 광주 서창면 용두리에 거주한 낙안 오씨(樂安 吳氏) 오동규(吳東奎)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지극히 어렵고 가난한 집안에 시집을 왔으나, 여든을 넘긴 시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남편마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자녀 없이 홀로 남겨진 청상과부의 삶을 받아들이고, 끝내 재가하지 않은 채 수절하며 조용히 생을 이어갔다.
그녀는 근검절약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아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살림을 일구었고, 모은 재화를 자신만을 위해 쓰지 않고 이웃을 위한 나눔으로 확장시켰다. 특히 부모 없는 고아를 데려다 키우며, 진정한 공동체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녀의 효행과 열행, 그리고 선행은 유림 사회와 지역 공동체로부터 깊은 찬사를 받았고, 광산문화원장을 비롯한 유림 3개 단체장으로부터 효열 및 선행 표창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김원순 < 金元順 >
김원순(金元順)은 광주 서창면 용두리에 거주한 장흥 고씨(長興 高氏) 고광옥(高光玉)의 부인이다. 그녀는 혼인한 지 5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스물네 살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되었지만, 남편의 유자녀를 친자식처럼 정성껏 돌보며 가정을 지켰고, 평생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며 훌륭한 가풍을 이어갔다.
특히 시부가 오랜 병환으로 5년간 병석에 있을 때, 그녀는 밤낮없이 곁을 지키며 극진한 간호를 이어갔다. 이어 시고모가 10년 동안 장병(長病)에 시달릴 때에도 몸소 목욕을 시키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정직한 수발을 다하였다.
이러한 정절과 효행, 그리고 가풍을 바르게 잇는 삶은 지역 유림과 행정기관의 귀감이 되었으며, 그 공적을 인정받아 광산군수와 광주향교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홍성장씨
홍성장씨(洪城張氏)는 본관이 홍성이며 광주 서창면 세하리 동하마을에서 태어났다.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기두(金琪斗)의 부인으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평생 수절하였고, 가난한 살림에도 근검절약과 부지런한 삶으로 마침내 부농의 터전을 일구어냈다. 정직과 성실의 삶으로 지역사회에 귀감이 되는 존재가 되었으며, ‘향당(鄕黨)의 모범’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특히 그녀는 시모가 장기간 병석에 누워 있을 때도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하는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그 효행은 널리 회자되었다.
1957년 1월 5일, 그녀는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 고귀한 열행은 사후에도 지역에서 깊이 추앙되었다. 이에 따라 지역의 유교 단체장들로부터 표창이 있었으며 광주 서창면 사동마을 입구에는 ‘김해김씨열부각 열부홍성장씨행적비(烈婦洪城張氏行蹟碑)’가 세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