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박지흥 < 朴智興 >
박지흥(朴智興, 1411~1489)은 본관이 충주이며, 판서공(判書公) 박소(朴蘇)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청남도 대전에서 출생하였고, 조선 초 정치 혼란이 심화되던 시기, 특히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관직에 나아가기를 단념하고, 처가와 연고가 있던 광주 서창동 절골로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학문에 전념하여 성균관 진사시에 장원하였다는 기록이 족보와 향토 문헌에 전한다. 조정으로부터 관직 제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를 고사하였다는 전승이 있으며, 이러한 행적은 그가 벼슬보다 학문과 절의를 중시한 ‘강호처사형 문인’의 전형이었음을 보여준다.
광주로 이주한 뒤 그는 하동정씨와 혼인했으나 사별하였고, 1462년에는 이천서씨 서종하의 딸과 재혼하였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자녀를 두었으며, 57세에 장남 박정, 63세에 눌재 박상(朴祥), 65세 무렵에는 육봉 박우(朴祐)를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박지흥은 생전에 큰 관직을 지내지 않았으나, 후손들의 관직 진출과 공훈에 따라 사후에 증직되었다. 셋째 아들 박우는 강원도관찰사와 이조참의를 지낸 뒤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손자 박순(朴淳)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에 따라 박지흥에게는 조정으로부터 의정부 좌찬성이 추증되었고, 후손들은 그를 ‘찬성공(贊成公)’이라 존칭하였다. 좌찬성은 조선 전기 종1품 당상관으로, 세종 19년(1437년)에 설치된 고위 직책이다.
그가 정착한 광주 서창동 절골 마을은 이후 충주박씨의 대표적인 세거지로 자리 잡았으며, 봉산재(鳳山齋), 송호영당(松湖影堂) 등 가문 관련 유적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절골은 과거 ‘사동(寺洞)’이라 불리던 마을로, 광주 사림의 중요한 기반이 된 지역이다.
박지흥은 조선 전기의 정치 격동기 속에서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과 가문의 명맥을 지켜낸 인물이다. 후손들의 출중한 관직 진출로 인해 ‘찬성공’이라는 존칭을 받았으며, 그의 생애는 광주 지역 충주박씨 집성촌 형성과 호남 사림의 기반 조성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완종 < 李完宗 >
이완종(李完宗, 1816년생, 몰년 미상)은 본관 전주(全州李氏)로, 전라남도 광주 서창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사후에 통덕랑(通德郎)으로 증직되었다. 통덕랑은 조선시대 문반의 정5품 상계 품계로, 《경국대전》에 규정된 공식 관직이다.
향촌 유림 계층에 속한 인물에게 관직을 부여하는 전통에서, 이완종에게 내려진 통덕랑 증직은 명예적 성격의 관례적 배려로 해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