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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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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붕 < 朴 鵬 >

박붕(朴鵬, 1435~?)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음성, 자는 백금(伯禽) 또는 도남(圖南)이다. 전라남도 광주 서창동 출신으로, 참봉을 지낸 박자회(朴子回)의 아들이며, 형은 성균관 사예를 지낸 박곤(朴鯤)이다.

그는 예문관 계통의 한림직 관료로 활동한 인물로, 관직은 성균관 전적, 홍문관 대교, 예문관 봉교, 한림제학 겸 춘추관 기주관 등을 역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광주읍지등의 향토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과거 경력은 비교적 명확히 전해진다. 1495(연산군 1) 증광시에서 생원 350, 진사 315위로 양과에 입격하였으며, 이후 1504(연산군 10) 갑자년 식년 문과에서 을과 6위로 급제하였다.

박붕은 조선 중기 인물 박광옥(朴光玉, 호 회재)의 작은아버지로, 박광옥의 글에 백부 붕은 한림을 지냈고, 아버지 곤은 사예를 지냈다. 선생께서 남주(南州)에서 중망을 얻어 명문가로 이름이 났다는 기록이 있어 그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박붕은 과거 급제 이후 관직 생활을 통해 학문과 인품을 인정받았으며, 지역 사족 가문에서 위상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박 곤 < 朴 鯤 >

박곤(朴鯤, 1437~1524)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음성, 자는 변갑(變甲), 호는 무민(無悶)이다. 아버지는 참봉 박자회(朴子回)이며, 그는 광주 서창동 회산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495(연산군 원년) 증광시 생원시에서 339위로 입격하였고, 1501(연산군 7)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04417, 정성근(鄭誠謹)과 조지서(趙之瑞) 등의 죄를 논의하던 조정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개진하였으며, 이는 그의 소신 있는 언론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평가된다. 1513년에는 사헌부 지평으로 재임하며 대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517년 대간에서 그의 관직 승진을 청했으나, 중종의 윤허를 받지 못해 1521년 이전의 경력에 머무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524829, 경상도 관찰사 성세창(成世昌)의 장계에 예천군수 박곤이라 보고된 사실을 통해 외직 활동을 계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성균관 사예를 지냈으며, 사후에는 도승지로 증직되었다.

박곤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지닌 인물이었고, 관직에 있으면서도 언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직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박광옥(朴光玉)의 부친으로, 박광옥은 자신의 기록에서 큰아버지 박붕은 한림을 지냈고, 아버지 박곤은 사예를 지냈다고 밝히며, 일가의 학문적 전통과 충절의 계보를 증언하였다.

오백안 < 吳伯顔 >

오백안(吳伯顔)은 본관이 낙안으로, 광주 용두동 출신인 오척(吳陟)의 아들로 전해진다. 조선 전기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으로, 예문관 한림, 홍문관 대제학, 전라도사 등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전해지는 문헌이 많지 않아 그의 생애와 관직 수행의 구체적 행적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는 1465(세조 11)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4위로 급제하였으며, 이 사실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49 제계고(諸系考)10조에는 오백안을 낙안오씨(樂安吳氏)의 시조로 명기하고 있어, 후대 문헌들에서 그를 낙안오씨의 시조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예문관 한림, 홍문관 대제학, 전라도사 등의 관직 수행과 관련된 구체적인 연대나 활동 내용은 조선왕조실록등의 1차 사료나 관직 임명 교첩에서 아직까지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일부 문헌의 전언을 중심으로 그의 관직 이력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박 우 < 朴 祐 >

박우(朴祐, 1476~1547)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충주,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峯)이다. 아버지는 성균진사 박지흥(朴智興), 형은 사림파의 거목인 눌재 박상(朴祥), 아들로는 연파 박개(朴漑)와 사암 박순(朴淳)이 있다.

그는 1476(성종 7) 광주 서창면 절골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고령으로 일찍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형들의 보호 아래 학문을 연마하였다. 1507(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0년 식년 문과에서 병과 16위로 급제하였다.

관직 초기는 예문관 검열, 대교, 봉교 등을 거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며 문한직을 밟아갔다. 이후 중종 대에는 장령, 사헌부 집의, 홍문관 부응교, 전한, 직제학, 승정원 동··좌 부승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1532년 강원도 관찰사, 1536년 공주목사, 1541년 한성부 우윤, 1542년 개성부 유수, 1545년 한성부 좌윤 등 주요 지방 행정관직을 두루 맡았다.

1533년 우승지로 발탁되었으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조정을 장악하고 정직한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외직을 청하여 남원부사로 나아갔다고 전한다. 이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 있다.

말년에는 동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전주부윤으로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1547(명종 2) 928, 향년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박우는 청렴하고 곧은 성품으로 평가되며, “덕행을 근본으로 삼고 재능은 지엽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문장력 또한 뛰어나 찬문, (), 잡서(雜書)에 능했으며, 형 박상의 문집인 눌재집에 서문을 남겼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 개 < 朴 漑 >

박개(朴漑, 1511~1586)는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충주, 자는 대균(大均), 호는 연파(煙波)이다. 영의정 박순(朴淳)의 형이자, 육봉 박우(朴祐)의 장남으로, 광주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1531(중종 26) 향시에서 양장(兩場) 모두 장원에 올라 뛰어난 학문을 인정받았으나, 회시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선비 한 사람이 말에 밟혀 죽는 사고를 목격하였다. 그는 이를 깊이 분노하고 슬퍼하며 과거 응시를 단념하고, 세속을 벗어나 은거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그는 유일(遺逸)’로 여겨져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1546(명종 원년) 음보로 선공감주부에 제수된 뒤 참봉에 이어 한성부참군, 장원(掌苑), 1573년 고산현감, 김제군수 등을 역임하며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다. 선조 대에는 그의 시문이 인정받아 문인으로서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공직 생활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관직보다는 시문에 몰두하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갔다. 세속을 초월한 삶의 자세와 청빈한 태도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연파처사(煙波處士)’라 높여 불렀다.

그는 조선 문단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던 미암 유희춘과 깊은 교유를 나누었으며, 두 사람의 시문과 서신은 미암일기미암집에 다수 전하고 있다. 유희춘 사후에는 직접 제문을 지어 그의 뜻을 기리는 등, 두 사람의 관계는 당시 문인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교유의 사례로 꼽힌다.

1586(선조 19)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76세였다. 그는 관직보다는 시문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로, 조선 중기 문단에서 서정성과 기품을 갖춘 강호처사형 선비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박재희 < 朴再益 >

박재희(朴再喜, 1677~?)는 본관이 충주(忠州)이며, 전라남도 광주 서창면 절골 마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무반의 정3품 상계 품계인 절충장군에 올랐고, 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 직책인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첨지중추부사는 중추부(中樞府) 소속의 정3품 당상관으로, 당시 군사 및 왕명 출납에 관여하는 중요 관직이었다. 이 직책은 일반적으로 첨지라 줄여 불렸으며, 명예직으로 제수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그가 받은 절충장군은 무반 가운데 서반(西班)에 속한 품계로, 3품 하계인 어모장군(禦侮將軍)보다 한 단계 상위에 해당하며, 실질적 무관 경력과 무과 출신 인물에게 부여되는 중요한 품계였다.

 

박봉주 < 朴鳳柱 >

박봉주(朴鳳柱, 1868~1936)는 전라남도 광주부 남정(南町)을 본적으로 둔 대한제국 말기의 관료이자 조선총독부 시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호는 초은(樵隱)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 내장원경, 봉상사 제조, 사직서 제조 등 궁내부 요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일제가 한일병합을 단행한 뒤에는 궁내부와 장례원에서 근무하며 일제 통치에 협력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어 3년간 재직하였으며, 이는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 자문기구에 참여한 것으로, 대표적인 친일 경력 중 하나로 꼽힌다.

그의 친일적 성향은 이미 1909년 광주 지역 의병에게 나라를 파는 자로 지목되어 납치·협박당한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는 당시 지역 사회에서 그의 행보가 비판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12년 일본을 시찰한 그는, 이후 경제·사회 전반에서 친일 기반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에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0년 송정금융조합 조합장, 1921년 호남물산 이사 등으로 활약하며 지역 유지로서 영향력을 넓혔다.

1922년에는 전남유도창명회 발기인 및 부회장을 맡았고, 1924년 국민협회 회원, 1929년에는 대성원 전남총지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유림계 친일단체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이들 단체는 일제의 통치 이념을 조선 사회에 확산하는 데 협조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박봉주는 인장을 위조한 혐의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전력도 있으며, 이는 그의 행적에 사기적 요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사후 2000년대 들어 일제에 협력한 친일 인사로 공식 규정되었다. 2002년 국회의원 친일진상규명 모임의 친일파 708인 명단, 2007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수록예정자 명단 등에 모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