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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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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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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 < 朴 禎 >

박정(朴禎, 1467~1498)은 본관이 충주(忠州)이고 호는 하촌(荷村)이다. 1467년 광주 사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기질이 총명하고 문장이 빼어났다. 학문을 독실히 닦고 행실을 곧게 다져 명성이 사방에 퍼졌다. 당시 선비들은 그를 뛰어남 속에서도 개선할 점을 찾아 더욱 발전해가는 백미지양(白眉之良)이라 칭송했다.

그는 1492(성종23) 18세에 壬子式年司馬榜目에서 100명 중 장원했다. 23세 때인 1489128일 부친이 별세했다. 그는 모친 이천서씨(利川徐氏)를 모시며 가정을 책임졌다. 그는 열여섯 살 동생 박상(朴祥)과 열네 살 동생 박우(朴祐)를 정성으로 가르쳤다. 두 동생 모두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송나라 부자삼소(父子三蘇)에 비견해 형제삼박(兄弟三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의이씨(全義李氏)와 혼인해 아들 박호손(朴虎孫)을 두었다. 그는 149872일 서른두 살의 나이로 요절하여 젊은 나이에 뜻을 펴지 못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글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의 남은 작품은 동생 박상(朴祥)눌재집(訥齋集)부집에 실린 등서석산부(登瑞石山賦)한 편이 전할 뿐이다.

박 상 < 朴 祥(1474 ∼1530) >

박상(朴祥, 1474~1530)은 조선 전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본관은 충주, 호는 눌재(訥齋)이다. 선대는 충청도 회덕에 살았으나, 부친 박지흥(朴智興)이 광주 방하동, 곧 오늘날의 서창(西倉)으로 이거하면서 그는 서창 사동(寺洞) 마을에서 1474(성종 5)에 태어났다.

그는 문장과 절의가 뛰어난 선비로,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을 날렸다. 부정과 폐단을 보면 앞장서 상소를 올렸고, 청렴하고 직무에 충실해 염백리(廉白吏)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광주 봉산재(鳳山齋)의 문 위에는 완절문(完節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그가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훈구파와 왕실 인척을 비판하며 올곧은 정론을 폈던 뜻을 기리는 것이다.

중종 초기에 그는 사간원 헌납으로 재직하며 종친 등용을 반대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하옥되었다. 이후 1515년 담양부사로 재직하던 중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군수 유옥(柳沃)과 함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박상은 나주 오림역(현 봉황면 오림리 원오림마을)으로, 김정은 보은으로 유배되었다. 이 상소를 기념하기 위해 전북 강천산에는 삼인대(三印臺, 전북유형유산)가 세워져 있다.

1505(연산군 11), 32세의 나이로 전라도사(全羅都事, 오늘날 전라남북도 부지사에 해당됨)에 임명되었다. 그해 8, 나주에서 우부리(牛夫里)라는 인물을 국문하던 중 장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부리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후궁의 부친으로, 천민 신분임에도 토지를 강탈하고 부녀자를 능욕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으나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이에 박상은 금성관(錦城館) 뜰에서 우부리를 엄히 다스리다가 끝내 장살하였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연산군은 박상의 체포를 명했으나, 그는 상경 도중 체포를 피했고 곧이어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며 중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일은 박상의 성품이 얼마나 강직하고 정의로웠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신수근(愼守勤)의 딸인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에서 폐출되었다. 이는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반정공신들이 신수근의 협조 거부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역적의 딸'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결과였다.

1515,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천재지변이 잇따르자 중종은 널리 의견을 구했다. 이때 담양부사였던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88, 신비 복위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무안군수 유옥도 논의에 참여했으나 상소문은 박상과 김정의 이름으로 올라갔다. 이 상소가 바로 유명한 신비복위상소(愼妃復位上疏)’이다.

상소는 반정공신들의 부도덕함을 폭로하고 이들을 탄핵함으로써 도학정치를 구현하려는 사림의 정치의식을 보여준 것이었다. 박상은 권력과 명예보다는 도의와 정의를 우선시하는 사림의 지조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1530(중종 25), 56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위패는 광주의 월봉서원, 담양의 구암서원, 순창의 화산서원에 모셔졌다.

박상은 과거에 급제하고 중시(重試)에서 장원하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학문이 깊고 도량이 넓으며, 사려가 깊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문집 눌재집(訥齋集)2025년 한국학호남진흥원에서 호남선현문집국역총서11’로 두 권으로 간행되었으며,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는 역사서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