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박 정 < 朴 禎 >
本貫(본관) 忠州(충주), 號(호) 荷村(하촌) 1467년(世祖(세조) 12年(년)) 西倉面(서창면) 절골마을에서 출생, 科程(과정)은 비록 進士(진사)에 그쳤으나, 뛰어난 道學(도학)과 文章(문장), 그리고 正大(정대)한 성품은 當代士林(정대사림)의 指標(지표)가 되었으며 父親歿後(부친몰후)에 訥齊(눌제)와 六峯(육봉) 두 아우를 가르쳐 大成(대성)케 하였으며 六峯(육봉) 祐(우)의 아들 思庵(사암) 淳(순) 또한 그 문하에서 배워 학문이 大成(대성)하였다.
박 상 < 朴 祥(1474 ∼1530) >
조선초 초기의 文章家(문장가)이며 節臣(절신), 號(호)는 訥齊(눌제) 本貫(본관)은 忠州(충주), 進士(진사) 朴智興(박지흥)의 아들이며 當代(당대)의 名賢(명현) 思庵(사암) 朴淳(박순)과 叔嫉間(숙질간)이다. 公(공)은 西倉面(서창면) 寺洞(사동)마을에서 태어났고 學業(학업)을 伯兄(백형) 荷村(하촌)에게서 닦았다.
22세에 進士(진사)가 되었고 1501년 27세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였으며 뒤에 重試(중시)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여 校書館正字(교서관정자), 司諫院(사간원) 獻納(헌남) 弘文館修擇(홍문관수택), 校理(교리)를 거쳐 湖當(호당)에서 공부하였고 이어 弘文館應敎(홍문관응교), 潭陽(담양), 順天府使(순천부사), 尙州(상주),忠州(충주), 羅州牧使(나주목사)들의 여러 벼슬을 두루 지냈다. 公(공)이 全羅府事(전라부사)로 부임하자, 나주의 賤人(천인) 牛夫里(우부리)가 燕山主(연산주)의 後宮(후궁)인 딸의 권세를 믿고 橫暴(횡포)를 瓷行(자행)하므로 나주 錦城館(금성관) 뜰에서 杖殺(장살)한 事實(사실)로도 그 性品(성품)이 얼마나 곧고 굳센 것을 짐작할 수 가 있다.
그리고 潭陽府使(담양부사)로 있을 때 淳昌府使(순창부사) 金淨(김정)과 더불어 反正元勳(반정원훈)들의 推罪(추죄)를 상소하였다가 南平(남평)에 流配(유배)되었고 그의 상소의 是非(시비)가 廟議(묘의) 兩立(양립)을 가져와 드디어 己卯士禍(기묘사화)의 原因(원인)이 되었다.
公(공)의 一生(일생)은 波欄(파란)많은 生涯(생애)였으나 屹然獨立(홀연독립)하여 世態炎凉(세태염량)에 휩쓸리지 아니하였다. 李退溪(이퇴계)는 그의 놓은 節氣(절기)와 학식을 일컬어 「하늘이 내린 完人(완인)」이라 하였다. 淸白吏(청백리)로 錄選(록선)되고 文章家(문장가)로 이름이 높아 成信(성신), 申光漢(신광한), 黃廷彧(황정욱)과 더불어 徐巨正以來(서거정이래)의 四家(사가)로 높이 칭송되었다. 正祖(정조) 時文(시문)과 論音(논음), 敎旨(교지) 등을 모아 만든 弘齊全書(훈제전서)에 조선 5백년의 으뜸가는 時人(시인)이라 일컫는 把翠軒(박취현), 朴誾(박은)과 비교하면서 訥齊詩(눌제시)의 우월함을 찬양하였으니 그의 詩才(시재)를 짐작할 수 있다.
1530年(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니 吏曹判書(이조판서)가 追贈(추증)되고 시호를 文簡(문간)이라 하였으며 光州(광주)의 月峯(월봉), 淳昌(순창)의 華山(화산) 潭陽(담양)의 龜岩書院(구암서원)에 祭享(제향)되었다. 著書(저서)는 訥齊集(눌제집)8권이 있는바 詩(시)의 句節(구절)이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가난한 農民(농민)의 呈狀(정상)이 그려져 있으며 爲政(위정)의 잘못을 비꼬는 諷刺(풍자)가 속속들이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