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박광옥 < 朴光玉 (1526∼1593) >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1526~1593)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의병도청을 세워 고경명, 김천일 등에게 후방 지원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음성이며,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다. 중종 21년(1526) 1월 26일 광주목 선도면 개산리(현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에서 사예(司藝) 박곤(朴鯤)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3년 동안 상을 치르면서 그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10세 때 조광조의 제자인 남원 출신 정황(丁愰, 1512~1560)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21세인 명종 1년(1546)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명성을 얻었다. 명종 11년(1556)에 개산송당(蓋山松堂)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유교 철학인 도학(道學)ㆍ성리학을 연구했다.
박광옥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개산 남쪽에 연못(개산방죽)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작은 정자인 ‘수월당(水月堂)’을 세웠다. 이곳에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등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선조 1년(1568), 43세에 학문과 인품으로 추천받아 처음으로 종9품 내시부 교관이 되었다. 이후 선조 7년(1574)에 종부시 주부, 운봉현감을 지냈으며,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운봉에서 황산대첩비를 세우고 운봉향교를 중수하며, 남는 곡식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인재를 육성하였다. 운봉현감을 마친 뒤, 운봉 지역의 유지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선정비를 세웠다.
1575년에 춘추관 기사관으로 승진하여 청렴하고 엄정하게 업무를 처리하였다. 이후 전라도사, 충청도사, 예조정랑, 성균관과 춘추관 기주관 등을 역임했다.
사헌부 지평 시절인 1580년에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후 특평(特平)이 되어 권력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다 미움을 받아 직강으로 좌천되었으며, 결국 영광군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89년(선조 22년) 사첨시정 지제교로 있을 때 ‘정여립 옥사 사건’으로 인해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64세 때였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수품을 지원하였다. 의병 활동을 인정받아 1592년 나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593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황산 서쪽에 용암서원(龍巖書院)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냈다. 광주 유림은 1602년(선조 35년)에 벽진서원(碧津書院)을 세워 박광옥을 기렸다. 1678년에는 김덕령(金德齡)을 합사하여 의열사(義烈祠)가 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7년 운리영당(雲裏影堂)을 세워 회재의 영정을 모셨다.
광주광역시는 2009년에 남구 칠석동에서 서구 농산물유통단지-풍암지구 신암마을(저수지), 원광대 한방병원에서 남구 대남로까지의 길을 '회재로'로 명명하여 그의 공을 기렸다.
1999년 풍암지구 개발로 묘소와 영당이 풍암동으로 이전되었으며, 운리사(雲裏祠)를 다시 지어 영정을 모셨다. 《회재유집》 목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제23호이며, 운리사는 벽진서원으로 바뀌어 2021년 1월 광주광역시 서구 향토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김세근 < 金世斤 (1550∼1592)>
김세근(金世斤, 1550~1592)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장이다. 그는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마륜동(馬輪洞) 출신이며 본관은 김해, 자는 중빈(重賓), 호는 삽봉(揷峰)이다. 김해 김씨의 절효공 김극일(金克一)의 후손으로 명종 5년인 1550년 4월 16일에 태어났다.
김세근 가문이 함안에서 광주로 옮기게 된 것은 1498년(연산군 4년) 발생한 무오사화 때문이다. 그의 방조(傍祖)인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기록한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자,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은 화를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남도 흥양(興陽, 현재의 고흥)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광주의 서구 세하동(細荷洞)에 터전을 잡았다. 세하동의 이름은 김세근의 이름 가운데 ‘세(世)’ 자에서 유래했으며, 후에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세(細)'자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김세근은 1576년(선조 9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이듬해인 1577년 문과에 합격하여 종부시주부를 역임하였다.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양병론(養兵論)에 깊이 공감하여 왜적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 양성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588년(선조 21년)경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한 김세근은 광주 세하동 뒷산인 백마산(해발 134m)의 수련골에서 주변 장정들을 모아 무예를 연마하며 전란에 대비했다. 이 같은 그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자 나주, 장성, 화순 일대에서도 장정들이 모여들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증가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세근은 백마산 수련골에서 훈련시킨 수백 명의 장정을 이끌고 전국 최초로 6천여 명 규모로 결집한 담양회맹군에 합류하였다. 그는 김덕령(金德齡)의 형인 김덕홍(金德弘),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등과 함께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하며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황간(黃澗)까지 진격하여 적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전투 도중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 스승이자 호서 지역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격문을 받고 다시 병든 몸으로 출정하였다. 김세근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군영을 정비하던 중 왜군이 금산으로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금산으로 진격하였다. 그는 충청북도 충주 인근의 눈벌이라 불리는 와평(臥坪) 전투에 부장으로 참전하였으나, 이곳에서 제봉 고경명과 함께 순절하였다.
김세근을 배향하고 있는 학산사 경의당은 2018년 광주광역시 서구 향토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김극추 < 金克秋 >
김극추(金克秋, 1552~1610)는 임진왜란 때 뛰어난 활약을 펼친 의병장이자 문무를 겸비한 선비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여직(汝直), 호는 절봉(節峰)이다.
김극추는 1552년(명종 7년) 4월 8일, 현재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김필(金弼)이며, 증조부는 무오사화 때 순절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그는 남다른 용맹을 보였으며 학문에도 깊어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김극추의 명성은 당시 광주목사로 부임했던 도원수 권율(權慄)의 귀에 들어갔다. 권율은 그를 직접 만나 교류를 나누면서 그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하였다. 이후 둘은 학문을 논하면서도 무예를 겨루는 등 깊은 친교를 이어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이 의병을 일으켰고, 김극추는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전장에 나섰다. 특히 같은 해 7월에 벌어진 이치 전투에서는 전북 금산(金山) 근처 영정곡(永貞谷)에서 고을 장정들을 이끌고 복병작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다. 그 공으로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유명한 행주대첩에서도 사생결단의 용맹을 떨쳐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행주전투 이후 김극추는 특진하여 내직으로 병조좌랑과 군기첨정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경성판관(鏡城判官), 해미현감(海美縣監)을 거쳐 영천군수(榮川郡守)에 임명되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파면당하기도 했지만, 군민들의 적극적인 탄원으로 다시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복직하였다.
이러한 충의와 공적을 인정받아 김극추는 1605년(선조 38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으로 책록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입은 상처가 끝내 회복되지 않아 1610년(광해군 2년) 1월 9일 향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좌승지로 추증하고 중직정려(忠直旌閭)를 내려 광주 광산구 우산동의 삼강정려(三綱旌閭)에 모셨다. 이 정려는 현재 도시개발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전된 상태이며, 충청남도 금산의 금곡사(金谷祠)에 배향되어 있다.
황 호 < 黃 顥 >
황 호(黃顥, ? ~ 1597)는 장수(長水) 황씨로 자는 사서(士瑞)이며, 호는 남제(南齊)이다. 그는 광주 풍암동 운리(雲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선조로는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계로 전한다.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화통하였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고을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장정 수백 명을 규합하여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南)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복남이 조직한 전라의 관군·의병 연합부대는 웅치(熊峙)·운치(雲峙)·이치(梨峙) 등지에서 왜군과 격전을 치르며 호남 관문을 사수하고자 했다. 황 호는 북문 방어 등 위험한 전장마다 선봉에 나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왜군 5만 6천여 명이 남원성을 포위하자, 그는 이복남·김경로(金敬老) 등과 함께 성내로 진입해 결전하였다. 1597년 8월 16일 새벽 남문이 돌파되자 그는 끝까지 북문을 지키다 전사하였고,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 전투는 조–명(朝–明) 연합군 4천과 의병이 장렬히 전멸한 전란의 비극으로 기록된다.
전쟁 종결 뒤 조정은 그의 충의를 기려 정삼품 무관 품계인 어모장군(禦侮將軍)과 판결사(判決事)를 증직하였다. 어모장군은 절충장군 바로 아래의 서반 정3품 품계로, 전장 공훈자에게 내리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박대수 < 朴大壽 >
박대수(朴大壽, 1533~?)는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인수(仁叟)라 전하고, 일부 자료에는 인유(仁臾)라 쓴다. 호는 송계(松溪)이다.
광주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증조부는 좌찬성 박지흥(朴智興)이고 부친은 박호손(朴虎孫)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돈후하고 문장과 무략을 겸비했으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가 참모관이 되었고, 예리한 전략으로 왜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광주 의병소에서는 제봉 고경명(高敬命)과 호흡을 맞추며 가열차게 의병 활동을 펼쳤다.
《금곡사지(金谷寺誌)》에 따르면 그는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의병을 모아 이복남(李福南)·권율 진영에 가담했고, 1592년 금산(錦山) 이치(梨峙)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음사로 적량만호에 제수되었다.
광주 의병소 참모로 있으면서 그는 감사 이광(李洸)이 금강에서 패전한 사실을 듣고, 육촌동생 박희수(朴希壽)와 함께 진중으로 달려가 장검을 쥐고 꾸짖었다. 이광은 “내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박대수 형제가 두렵다”라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후일 그는 권율 진영의 군수·인사 업무를 도맡아 처리했고, 전란 뒤에는 관직 제수 기록이 더는 남지 않아 행적이 묘연하다. 다만 《호남절의록》 등에서 광주의 대표적 애국지사로 추숭되어 왔다.
박희수 < 朴希壽 >
박희수(朴希壽, 1540~1599)는 본관이 충주 이며 자는 덕로(德老)이고 호는 회헌(懷軒)이다. 그는 광주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문간공 눌재(訥齋) 박상(朴祥)이고 아버지는 김해부사 박민제(朴敏齊)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돈후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무략도 겸비하였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학문과 실천을 결합한 선비로 자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음보로 후릉참봉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의기와 실천을 함께 길렀다.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집안을 빛낼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박광옥·고경명(高敬命)과 함께 호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가동(家僮) 64명과 미곡 80석을 의병소에 내고 향병 1,000여 명을 규합하였다. 동시에 의주 행재소를 왕래하며 군량을 조달하고 상소문을 직접 전달하였다. 이러한 봉사로 그는 전장에서 싸우지 않고도 병참과 정보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금강 방어에 실패하자, 육촌형 박대수(朴大壽)와 함께 진중으로 달려가 장검을 쥔 채 꾸짖었다. 이광은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박씨 형제를 두려워한다”라고 토로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일화는 그의 기개를 보여준다.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한성부참군과 사포서사포를 거쳐 형조좌랑에 올랐다. 이어 함열현령(咸列縣令)을 지내며 지방 통치를 경험하였다. 박희수는 전 현령과 장책제원(粧冊諸員)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고 군량 조달, 문서를 지켜낸 등의 공훈을 인정받아 1605년 4월 5일 자로 호성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전란 뒤 그는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599년(선조 32년)에 향년 60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광주 인근에 있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는다.
박희수는 직접 칼을 휘두르는 대신 병참·모집·외교·정보를 담당하며 전쟁 이면을 지탱한 선비 의병장이었다. 그는 “학문은 내면을 다지고, 의병은 나라를 구한다”는 정조(情操)를 실천하였다. 오늘날 광주 지역에서는 그의 봉공 정신을 기리는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박지효 < 朴之孝 >
박지효(朴之孝, 1553~?)는 평생 학문과 충의를 겸비한 선비였다.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육류정(六柳亭)이다. 1553년 광주 서창면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임란 의병장 박대수(朴大壽)이고, 그는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깊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마흔 살의 나이로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병량 모집과 전략 수립을 도왔다. 남평현감(南平縣監) 한순(韓楯)이 전사하자 감사 이시백(李時白)의 요청으로 남평 현감을 대신 맡아 성을 지켰다. 이때 홍민언(洪民彦)과 협력하여 군량을 조달했고, 임란이 잠잠해진 뒤에는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제수되었다.
1603년(선조 36년)에는 고경명과 그 두 아들을 제향하는 사우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고경명의 후손들과 함께 사액을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사액(賜額)과 편액을 받아내어 오늘의 포충사(褒忠祠) 성립에 큰 역할을 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벌어지자 김장생(金長生)이 삼남호초사(三南號苕使)로 내려와 그에게 모병유사(募兵有司)를 맡겼다. 그는 일흔다섯의 노구로도 병사와 식량을 모아 전주로 옮겼으며, 피난 중인 세자를 여산까지 호송했다. 인조는 이 공을 기려 장례원사간과 사헌부임제를 내렸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박지효는 난세에는 의병과 군량 조달로 나라를 도왔고, 태평시에는 스승과 전몰 의병을 추모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관직과 공신 책록을 사양하며 겸퇴(謙退)의 미덕을 지켰다. 그의 삶은 ‘학문으로 자신을 세우고, 의병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조선 선비정신의 한 모범으로 평가된다.
박광조 < 朴光祖 >
박광조(朴光祖)는 본관이 음성(陰城)이고 자는 경승(敬承)이다. 아버지는 습독을 역임한 박한(朴鷴)이다. 그는 박광옥과 재종 형제 관계에 있다. 벼슬은 승훈랑(承訓郞, 종 6품)에 그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옥을 따라 의병을 창의했다. 그는 고경명, 김천일의 막하에서 군량 확보를 전담했다. 그는 전라도 각 고을에서 곡물 수백 석을 모아 운송했다. 덕분에 의병 진영은 군량 부족을 겪지 않았다. 그는 운량부장(運糧部將) 직책을 맡아 활약했다. 이러한 사실은 《광주읍지》와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