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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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사행(使行) 2천리(千里)
임진왜란 때의 명장 권율(權慄)장군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재직 중에 있을 때의 일이다. 갑작스런 왜(倭)의 침입을 당하자 각지에서 들고 일어선 수천의 용병(勇兵)을 이끌고 전북일대와 호남 각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그 승전의 소식과 이곳 호남의 정세를 의주(義州)에 있는 임금에게 알려야만 하는데 왜적이 팔도(八道)에 가득하여 장계(狀啓)(임금에게의 보고서)를 전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 어린 정충신(鄭忠信)이 그 중대하고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어린것이… 하고 주위에서 말렸지만 그는 끝내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때는 삼복(三伏) 한더위였다. 행동이 민첩하고 지략이 뛰어난 정공은 온몸에 「옻칠」을 발라 나병환자(癩病患者)를 가장하고 왕에게 올릴 장계를 가늘게 노끈으로 꼬아 멜방(배낭)을 만들어 등에 지고 걸인행색(乞人行色)으로 먼길을 떠났다.
별로 배운 것은 없었지만 바탕이 영민(英敏)한 정공은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점」에도 능통하여 용하게 적진을 피해가다가 더러는 정탐을 위해 일부러 적진(敵陣)을 찾아들어 걸식을 하면서 밤낮으로 북행을 계속했다. 그래서 무사히 행궁(行宮)에 당도한 그는 메고간 멜방을 풀어 장문의 장계를 원상대로 만들어 왕에게 바치는데 성공을 했다.
이때 오성 이항복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선조왕(宣祖王)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정공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차린 이공은 정공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손수 글을 가르치니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물리(物理)에 대한 깨달음이 빨라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뛰어난 재간을 발휘했다. 정공의 상관이자 스승인 이항복은 일찍이 이런 말을 하여 정공을 극찬했다. 「정충신이 만약 칼을 버리고 책을 취하면 일대의 훌륭한 명사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그 해 겨울 무과(武科)에 급제한 정공은 1587년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전부대장이 되어 큰공을 세웠으며 그 후 승전(勝戰)을 거듭하여 포도대장(捕盜大將)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내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훌륭한 명신(名臣)이 되었다.」즉 광주광역시의 척추를 이룬 최대간선도로 금남로는 정충신공의 군호(君號)를 그대로 딴 것이다. -
도깨비 방망이
도깨비방망이 1화
먼 옛날 이 고장 매월동관내 개감산 동쪽 산골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다. 동생은 그지없이 착하고 선량한 사람인데 형은 부자로 잘 살면서 늙은 부모님을 가난한 동생에게 떠맡기고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지독한 욕심쟁이였다.
하루는 동생이 산에 땔나무를 하러가서 나뭇잎을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개암(개암나무열매, 모양은 도토리 비슷하나 조금 납작하고 맛은 밤 같으나 더 고소하고 달착지근함)한 알이 툭 굴러 떨어졌다. 아우는 이것을 주어서 「이건 아버지 갖다 드리자」하며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개암이 또 떨어졌다. 「이건 어머니 드리자」하고 호주머니에 넣었다.
다음에 서너 개가 연거푸 굴러 떨어졌다. 「이건 마누라」「이건 아들」「이건 딸」맨 나중에 것은 「이건 나먹자!」하고 주워 넣었다. 그러던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려고 산 속 다 쓰러져 가는 빈집에 들어갔다. 비는 쉴새없이 퍼부어 하는 수 없이 그 집에 머물러 있는데 밤이 되니 난데없이 「도깨비」들이 몰려왔다.
동생은 무서워서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깨비들은 「방망이」를 두드리며 술과 고기와 밥과 떡을 나오게 하고 그것을 먹고 떠들고 놀았다. 동생은 군침이 나오고 시장기가 들어 호주머니에 든 개암 하나를 입에 넣고 깨물었다. 단단한 껍질이 으깨지면서 「딱」하고 큰 소리를 냈다.
도깨비들은 그 소리를 듣고 그 집 대들보가 부러지는 소리로 잘못 알고 모두가 혼비백산 멀리 달아났다. 동생은 대들보 위에서 내려와 도깨비들이 버리고 간 술, 밥, 고기를 싸들고 「도깨비 방망이」까지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도깨비 방망이를 두들겨 뭐든 원하는 것을 나오게 했다. 그렇게 해서 집도 생기고 논밭도 생기고 해서 부자로 잘 살게 되었다.
욕심쟁이형이 그 소식을 듣고 점잖게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너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벼락부자가 되었느냐?」고 까닭을 물었다. 정직한 아우는 숨김없이 그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형은 전에 않던 「나무지개」를 들쳐 매고 동생이 말한 그 산으로 갔다.
개암 한 알이 툭 굴러 떨어졌다. 「이건 내가 먹고」하고 호주머니에 주어 넣었다. 또 한 개가 떨어졌다. 「이것도 나 먹고…」 개암이 떨어지는 족족 다 제가 먹겠다면서 호주머니 속에 주어 넣었다. 욕심꾸러기인 그는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하고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비도 오지 않는데 형은 그 빈집에 들어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밤이 되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방망이를 두들겨 밥과, 술, 고기를 나오게 해서 그것을 먹고 떠들며 놀았다. 그리고 도깨비들이 모여들자 「옳지! 이젠 됐다」 형은 대들보 위로 올라가 개암 한 알을 딱 깨물었다. 그런데 도깨비들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도망 칠 줄 알았는데 웬걸 그것이 아니었다.
「저번에 우리 방망이를 훔쳐간 놈이 또 왔구나. 그 놈 혼 좀 내주자」하며 형을 대들보 위에서 끌어 내렸다.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아랫도리만 홀랑 벗겨 「사타구니에 달린 귀중한 물건을」붙잡고 늘이면서 「한발 늘어져라!」뚝딱 「두발 늘어져라」뚝딱하며 방망이를 자꾸만 두들겨 대는 것이었다.도깨비방망이 2화
옛날 욕심 많은 과부 한사람이 이 곳 들 마을에 살고 있었다. 도깨비와 사귀면 금새 부자가 된다는 말을 듣고 그 과부는 도깨비가 좋아하는 「메밀묵」을 쑤어서 살강 밑에 놔두었다. 도깨비가 밤중에 찾아와서 그것을 감식하고 돌아가려 하자. 과부는 도깨비를 방안으로 불러들여 한 이불 속에서 밤을 새었다.
이렇게 해서 며칠이 지난 후 과부는 도깨비더러 돈과 금 은 보화를 갖다 달라고 졸랐다. 여부가 있을 리 없었다. 도깨비는 여자가 원하는 대로 돈과 귀한 보물을 많이 갖다바치고, 이렇게 해서 벼락부자가 된 과부는 도깨비가 귀찮고 싫어졌다. 내색을 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아기자기한 생활에 재미가 붙은 도깨비는 하루 밤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과부는 궁리 끝에 한 꾀를 생각해 냈다. 그녀는 은근한 목소리고 「당신이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뭐예요」하고 물었다. 「그건 왜?」「당신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모두 치워 없앨려구 그래요!」
과부가 어리광을 떨면서 이렇게 대답하자 도깨비는 그저 고맙고 흐뭇해서 「말대가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실토를 했다. 이 말을 들은 과부는 그날 밤 자기 집 대문에 피가 질질 흐르는「말대가리」하나를 걸어 놓았다. 밤이 되자 도깨비가 발걸음도 가볍게 과부 집을 들어가려다가 대문에 걸린 말 대가리를 보자 그만 질겁을 하고 달아나면서 온 마을사람들이 다 듣게 「여자에게 속 주지 마소!」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
두꺼비의 보은
두꺼비의 보은(報恩)
옛날 이 지방 무등산 계곡 어느 조그만 마을에 어머니와 딸 단 두식구만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봄날 그 두 모녀가 사는 조그만 초가집에 커다란 「두꺼비」한 마리가 동그란 두 눈을 굴리면서 뚜벅뚜벅 기어들어 왔습니다. 지난해 겨울의 지독한 추위에 그놈이 좋아하는「잔 벌레」들이 얼어죽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못 이겨 무턱대고 찾아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집 딸 순이는 그 두꺼비가 몇 년 전에 죽은 남동생 순동이처럼 귀여운 생각이 들어「두껍아 너 배고프지? 이 밥 먹어」하고 제 몫을 뚝 떠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순이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봄, 여름, 가을이 나는 동안 그 「미아(迷兒) 두꺼비」는 「머슴방목침」만큼이나 투박하고 튼튼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순이가 사는 그 산촌마을에는 옛부터 큰 재변이 하나 있어 마을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괴물에게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제물로 바쳐서 제사를 지내주면 한 10년 동안은 무사히 지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해가 10년이 되어 제사를 지내야만 하는데 거기에 바칠 제물로 순이의 차례가 된 것입니다. 「이젠 너에게 밥을 먹여주고 거둬 줄 수도 없겠구나」 두꺼비를 어루만지면서 순이는 그것이 더 슬프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삿날이 되고 제물로 바쳐질 순이는 어쩔 수 없이 괴물이 사는 굴 앞까지 걸어가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칠석마을 고싸움에 쓰는 「용줄」만큼이나 큰 「지네」한마리가 굴속에서 쑥 나타나 쓰러진 순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순이도 몰래 그 뒤를 따라온 두꺼비가 지네를 향하여 뿌옇게 「독안개」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흠칫 놀라 한 발짝 물러선 지네도 두꺼비를 보고 독 안개를 뿜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몇 십 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보기에도 끔찍스런 커다란 지네가 둘둘 똬리를 꼰채 죽어 있었고 그 옆에는 두꺼비가 커다랗게 눈을 뜬 채 네발을 쭉 뻗고 잠든 듯이 누워 있었습니다. -
박눌재선생과 고양이
박눌재선생과 고양이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文臣) 눌재(訥齎) 박상(朴祥)선생은 이곳 서창관내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희대(稀代)의 폭군(暴君)이며 패륜아(悖倫兒)인 연산군이 팔도(八道)에 채홍사(採紅使)를 내려보내 미색을 구하던 중 나주 골에 사는 무한 우부리(牛夫里)의 딸이 뽑혔다.
얼마 후 그 딸이 후궁(後宮)이 되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되자 그 아비 우부리는 자못 기세가 등등 제 세상 만난 듯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니 민심이 날로 흉흉하고 그곳 원님은 말할 것도 없고도 관찰사까지도 그 자의 비위를 거슬리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었다. 눌재 박선생은 불의(不義)를 보고서는 참지 못하는 의기호협(義氣豪俠)한 성품으로 비리(非理)를 척결하기 위해 전라도(全羅道)부사(조선조때 관사(官使)의 감찰과 규탄을 맡은 관직)를 자원하여 부임하였다.
그런 때 새로 도임 한 그에게 동료나 예 하 이 속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우부리에게 「부임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권유를 듣지 않자 사람들은 그의 전도를 걱정하는 형편임에도 눌재는 도리어 부하들에게 엄명을 내려 우부리를 잡아다가 곤장으로 쳐서 죽였다.
그때의 형세로는 실로 엄청난 폭거(暴擧)이며 이변(異變)이었다. 우부리의 집에서는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사람을 서울로 급파고변(急派告變)을 하니 대노(大怒)한 연산군의 명으로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이곳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한편 눌재 선생은 우부리의 죄상을 조정에 알리는 동시 당당한 자세로 대죄(待罪)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장성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야옹 야옹" 소리를 내며 따라오라는 듯 그의 바지가랑이를 물로 채기에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밟았다. 그동안에 사약을 가진 금부도사는 큰길로 가게되어 서로 길이 엇갈려 만나지 않고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는데, 곧바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그 사건은 불문(不問)에 붙이게 되었다.
[참고] 광산구 하남(河南)출장소관내 오산마을에 그 고양이를 제사지내는 논(묘창답(描倉畓)수십 두락을 두어 정양사(正陽寺)에서 수곡하여 왔는데 해방 후 국유지로 편입되어 버렸다. -
백마산 장수골
백마산(白馬山) 장수골
이 고장 서창동관내 중앙부에 있는 백마산은 높이 백여 미터의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그 모습이 수려하고 골짝이 깊어 임진 왜란때의 공신 삽봉 김세근(金世斤)장근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삽봉 김세근 장군은 조선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광조 김일손(金馹孫)선생이 조의제문사초(弔意帝文事秒)사건에 연루되어 참살(慘殺)당하는 화를 입자 종6품 벼슬인 종부(宗婦)시주부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경남 함안군 마륜동을 떠나 이곳 서창관내 세동마을로 옮겨왔다.
김장군은 관직에 있을 때 이율곡 선생과 같이 외침(外浸)에 대비한 양병론(養兵論)을 주장했으나 태평시대에 양병은 부질없는 민심을 소란케 하는 사론(邪論)이라는 간신배들의 반대에 의해 묵살(?殺)되고 말았다.
그러나 늘 외침을 염려한 김장군은 임란 4년전부터 마을 뒷 백마산 골짜기에 연병장(練兵場)을 설치하여 용력(勇力)있는 장정들을 규합하여 무술(武術)울 연마하기에 힘썼으니 차츰 그 소문이 퍼지고 김장군의 애국충정이 널리 알려져서, 나주, 화순, 담양등지에서 까지 수많은 장정이 모여들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정 수 백명을 이끌고 의병장(義兵將)으로 출전 금산대전에서 적의 왜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고경명장군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김장군이 장정을 훈련시킨 백마산 골짜기를 「수련골」이라하고 세동마을에서 절골로 넘는 고개를 「수련재」라 부르며 장정들의 숙소와 휴식처로 차일을 쳤다는 「차일봉」과 그 당시 사용했던 「옥동샘」백마산 상봉에 깊이 3미터 가량의 바위굴이 있는데 김장군이 이 굴에서 기거(起居)하면서 심신(心身)울 단련하였다 하여 「장수굴」이라 이르게 되었다. 참고로 백마산은 그 모양부터가 새끼 말을 거느린 어미 말을 닮아 우리에게 무척 친근감을 주고, 그리 높지도 않고 가파르지도 않아서 오르기에 알 맞는 산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팔월 추석이 되면 인근마을 청소년들이 떼를 지어 이 산에 올라 눈앞에 확 트인 서석들을 내려다보고 「맑은 가을날」의 하루를 보내면서 김장군의 위업(偉業)을 되새기고 기리는 것이 연례행사(年例行事)로 되어있었으며, 김장군의 뛰어난 용력(勇力)을 찬양하는 전설하나가 또 있는데, 백마산자락 동하마을 김성(김장군의 후손)의 집에 큰 바위 한 개가 끼워져 있는데 그 옛날 마을 뒤 백마산중에 살던 김장사(김세군장군을 지칭함)와 무등산에 사는 김장사가 「힘 겨루기」를 하는데 백마산 김장사가 백마산에서 던진 바위는 무등산에 영축없이 떨어지고 무등산 김장사가 무등산에서 던진 바위는 목표지점(백마산) 좀 못 미쳐 이 마을에 떨어졌는데 김성집담에 박힌 큰바위가 그것이며, 힘 겨루기 결과는 무등산 김장사가 지고 백마산 김장사가 이겼다는 것이다. -
백석골의 유래
백석(白石)골의 유래(由來)
우리나라에 건너왔다가 얼마 후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를 데리고 쓸쓸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미요 아주머니는 그 딸과 같은 나이또래의 용수를 자기 친자식처럼 귀여워 해주고 아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자란 용수로서는 그 고마움에 콧등이 찡해오고 눈물이 핑 돌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용수는 기미요 아주머니와 떨어져 있기가 싫어 한달에 꼭 한번밖에 없는 쉬는 날이 도리어 지겹고 싫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은 아침부터 눈이 많이 내리고 몹시 추운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늦어 아침밥을 굶고 집을 나온 용수가 「난롯불」을 데우다가 석탄가스를 흠뻑 들이마시고 갑자기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마침 그때 가게에 나온 기미요 아주머니는 용수를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한 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따뜻한 방안에 눕혔습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용수가 잠깐 밖으로 나갔다가 그 집 뒷마당에 서있는 「돌부처」를 보고 우뚝 발을 멈췄습니다. 그것은 자기 집 뒤 뽕밭 밭둑에 서있는 돌부처 님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저런게 왜 집안에 있지!」 용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옆에 있는 그 집 딸 「신애」에게 물었습니다. 용수와는 같은 나이지만 키가 크고, 중학교 이학년생인 신애는 「저런거라니…, 부처님더러 그렇게 말함 죄받는거야, 얼마나 고맙고 어지신 부처님이시라구!」하고 아주 어른스럽게 나무라듯 말하고나서 얼른 제방으로 들어가더니 「그림책」하나를 들고나와 용수앞에 펼쳐 놓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다 떨어진 옷에 거지꼴을 한 어린애들이 냇가에서 돌자갈을 쌓고 있고 그 곁에 험상궂은 얼굴을 한 어른 한사람이 채찍을 들고 서있는 아주 끔찍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는 용수에게 신애는 「어때-, 그 그림 무섭지-, 그리고 이 아이들이 얼마나 가엽니, 어린애들이 죽으면 다 이렇게 된대-」하며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그러나 용수가 뚱한 얼굴로 대꾸를 않자 신애는 또 말을 계속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는 큰 냇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마음씨 나쁜 저승사자가 지켜섰다가 그곳을 지나가는 애들을 붙들고 이렇게 돌 자갈을 쌓게 한대, 쌓다가 와글 무너지면 또 다시 쌓게하고 손발이 터져 피가 나오고 아픔에 못견뎌 엄마 아빠를 부르며 울고 불고 하지만 그 저승사자는 마구 매질까지 하며 놓아주질 않는대」 신애는 차츰 슬픔에 차는 용수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면서 또 책장을 넘겼습니다.
「이것봐!. 머리 위에 둥근 모양의 빛을 인 어른 한 분이 돌 자갈을 줍고 계시잖아. 이분이 바로 저기 계시는 부처님이야 「지장보살님」이라구!. 애들 대신 돌 자갈을 주워 쌓아 올려주시구. 그 저승사자에게 붙들린 애들을 등에 업어 냇을 건네주시거든, 얼마나 고마우신 부처님이냔 말야!」
신애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림책을 또 한장 넘겼습니다. 과연 거기에는 아까, 그 어린애들이 손을 잡고 다정스레 웃으며 냇물을 건너고 있었으며, 그중 한두 아이는 그 지장보살 부처님 앞에 엎드려 고사리같은 작은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용수는 아직 무슨 뜻인지 잘은 모르지만 어쩐지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신애는 말없이 그림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만에 목멘 소리로「근데 작년 이맘때 하나밖에 없는 내 남동생이 병으로 죽었거든, 그래서 우리 엄만 읍내 돌공장에서 저 부처님을 새겨다가 집에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자그마한 예쁜 돌맹이 하나씩을 그 앞에 던져놓고 죽은 동생을 위해 비시거든, 부디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십사"하고 말야, 그엔 좀 성질이 급하고 억세어서 나하곤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 손위인 내가 참아야 하는건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만 남거든…」하고 나서 두 눈에 괸 눈물을 닦았습니다.
용수는 그 날 석양 집으로 돌아오는 산길에서 주운 고운 돌멩이 몇 개를 집 뒤 뽕나무 밭둑에 서있는 돌부처님 앞에 놓고 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몇 년 전에 죽은 동생 용덕이의 명복(저승복)을 빌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생이 지금 살아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일터를 나간 후 아버지 혼자 쓸쓸하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그동안 돈을 벌어서 중학교에도 보내줄 수 있는데…"
용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날 낮 그림책에서 본 어린아이처럼 가슴앞에 두 손을 모았습니다. 「돌부처님, 제 동생 용덕이는 너무 어려서 제 발로 걷지도 못해요, 그래서 딴 애들처럼 냇물을 건너지 못하고 울고만 있을거에요. 그러니 도로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던가, 아니면 돌아가신 엄마 곁으로 데려다 주세요.」 이렇게 빌고 난 용수는 눈물어린 얼굴로 돌부처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날따라 그 돌부처님의 얼굴이 가끔 꿈속에서나 보는 어머니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보였으며 좀 일그러진 낮은 코까지 그렇게 같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용수의 마음에는 한가지 믿음과 기쁨이 싹텄습니다.
용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오나 비가오나 하루도 빼지않고 그 돌부처님 앞에 꿇어앉아 여러 가지를 빌었습니다. 동생 용덕이 일 외에도 아버지와 기미요 아주머니의 건강을 빌었고 또 그 해 보리농사가 잘 되도록 농삿일도 빌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신애일까지」를 빌려다가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 무슨 무렴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제풀에 얼굴을 붉히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또 몇 달이 흘렀습니다. 용수가 정성들여 바치는 돌멩이는 어느새 돌부처님의 무릎을 덮고 앙상한 뽕나무가지에도 새싹이 움트기 시작한 어느 이른 봄날의 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마침 이발소가 쉬는 날이어서 아침 일찍부터 용수는 아버지를 따라 풀을 매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서 그 돌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제 석양때까지 그곳에 서있던 돌부처님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사람들 발자국과 쌓아둔 돌멩이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지를 않겠습니까. 용수는 한참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거기서 좀 떨어진 고추밭에 거름을 주고있는 웃마을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저!, 아저씨, 저기 뽕나무 밭둑에 있던 돌부처님 어떻게 된지 모르세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어린놈이 왜 그런걸 다 묻느냐는 듯 쏘아보다가 용수의 두눈에 괴인 눈물을 보고 놀라며 「아까, 읍내 어느 부잣집에서 파 싣고 갔어. 아마도 자기 집 정원에 세워놓고 볼 모양이지, 나도 차에 실을 때 거들어 줬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읍내사람이 파 싣고 갔어요? 그 집이 어딘데요?」
용수는 돌부처님을 파 싣고 가는데 거들어 주기까지 했다는 그 아저씨가 몹시 얄미운 생각이 들어 대들 듯 다그쳐 물었습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그렇게 보고싶거든 내일이라도 읍내에 나가서 찾아보렴」 그 아저씨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망태바닥에 조금 남아있는 거름가루를 탁탁 털어 버리고 지게가 있는 쪽으로 성큼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용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섰으나 다니던 이발소에는 들리지 않고 읍내 큰 기와집만을 골라 대문안을 기웃거렸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잃어버린 그 돌부처님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꼬박 이틀을 걸려 거리와 골목을 헤맸으나 허사였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용수는 심한 피로와 절망으로 그만 자리에 눕게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몸도 낫고, 아버지가 밭에 나가시고 안계시는데 뜻밖에도 기미요 아주머니가 딸 신애를 데리고 용수네 집을 찾아왔습니다.
「오랫동안 네가 이발소를 안나와서 어찌나 궁금하든지 장에 나가 이 마을 사람 붙들고 알아봤더니 네가 앓아 누워 있다더구나. 그래서 오늘은 이발소가 쉬는 날 이어서 신애 시골구경도 시켜줄 겸 찾아왔단다. 일어나 앉아 있는걸 보니 좀 우선한 게로구나? 참 다행한 일이다.」
기미요 아주머니는 용수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어주면서 기쁜 얼굴을 지었습니다. 용수는 기쁘고 반가운 나머지 금방 눈물이 쏟아 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열은 없는데, 얼굴이 무척 야위었구나, 그동안 이발소 일이 너무 고됐던 모양이지-? 쯧쯧 입맛이 없을테니 이거나 좀 먹어봐라」
기미요 아주머니는 들고 온 종이봉지에서 생과자를 내놓고 귀한 밀감(귤)을 까서 용수입에 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신애는 눈에 띠는 모든 것이 무척 신기한 듯 집안 팍을 한바퀴 휘둘러 보다가 뒤안 담 밑에서 「삼색제비꽃」하나를 끊어들고
「이 꽃 참 예쁘지?, 이 근방 산에도 이 꽃 많이 피니?」
「응, 그 꽃도 피지만 지금 산에는 진달래, 개나리가 막 한참이야, 마을 뒤 소매봉 골짜기에는 온통 비단처럼 깔려있어.」
「어머나, 그래? 가까운 곳이면 좀 가봤으면…, 엄마 거기 좀 같이 갔다와-」
신애는 매달리듯 엄마의 팔을 붙들고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원 이런… 내가 거길 알기나 해야지-」기미요 아주머니는 딸의 응석에 난처한 얼굴을 지었습니다. 그것을 본 용수는 말없이 일어나서 웃옷을 걸쳐입었습니다.
「아니, 왜 그러니? 아픈 사람이 자리에 누워있질 않구-」 기미요 아주머니가 걱정스런 눈으로 용수를 쳐다봤습니다.
「아! 괜찮아요, 이젠 다 나은걸요 뭐, 자, 신애야 우리 얼른 거기 갔다오자, 산도 낮고 가까운 곳이니까, 잠깐이면 갔다 올 수 있어. 뭣함 아주머님도 같이 가시구요.」 용수는 머리가 어지럽고 발이 좀 휘청거리는 것을 참고 사립문을 나섰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빨리 다녀와요, 난 집을 지키고 이 근방에서 봄나물이나 캐고 있을테니까. 훗…」기미요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즐거운 듯 그 뒤를 따랐습니다.
「아이 고아라-,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넓은 산골짜기를 온통 분홍 빛 비단으로 깔아놨네-」 신애는 소매봉 골짜기 진달래동산을 보자 눈이 부신 듯 걸음을 멈추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지난 겨울이 따수워서 꽃이 많고 유난히 더 예쁜 것 같애…」용수는 사뭇 자랑스러운 듯 이렇게 말하면서 꽃잎 하나를 뚝 따서 입속에 넣었습니다.
「어머나! 너 꽃을 다 먹니? 꽃은 아무리 고와도 조금씩은 독이 들어있다는데…」 신애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괜찮아, 이 꽃은 사람 몸에 좋아서 어른들은 술에다도 넣어먹는걸…」
「그래? 그래도 아까워서 어떻게…?」
「아까울 것 없어, 이제 곧 시들어 버리는 걸 뭐-, 자- 너도 하나 먹어봐라 맛있다.」용수는 그 가운데 탐스러운 꽃가지 하나를 끊어 신애에게 주었습니다.
신애는 그 꽃가지를 손에 들고 보고 있다가 「이 꽃, 올해들어 첨 났으니까, 우리집 돌부처님께 갖다바쳐야지, 더 좀 끊어가도 될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용수의 두 눈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돌부처님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깜짝 놀란 신애가「어머! 너 왜 그러니? 어디 또 몹시 아픈게로구나?」하고 물었으나 용수는 고개만 숙일 뿐 대답을 안하고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뽕나무밭을 지나면서 없어진 돌부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젠 동생을 위해 빌 데가 없어졌으니, 걘 저승으로 건너는 냇가에서 자꾸만 허물어지는 돌 자갈을 쌓으면서 울고 있을거야!」 용수는 먼 산을 바라보며 슬프디 슬픈 얼굴을 지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신애는 용수를 데리고 읍내에 있는 신문사 지국을 찾아갔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면 집집마다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그 돌부처님을 찾아내자는 신애의 의견에 따른 것입니다. 마침 그 신문지국에는 배달원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수는 읍내에 주소가 없기 때문에 채용할 수가 없다는 지국장의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용수가 몹시 실망을 하자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던 신애가 「저라면 어떻겠어요? 집이 읍내에 있으니까요」
「음 너라면 괜찮지, 그러잖아도 되도록 착실한 고학생을 구하고 있는 참이니까」하면서 곧바로 승낙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용수는 미안하다는 듯 신애를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신애는 다음날부터 신문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창피하고 부끄럽기도 했으나 「남을 위해서 하는 좋은 일 인데」하는 자랑스러운 생각이 신애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학교가 파하면 곧장 신문지국에 들려 아직도 석유냄새가 물씬나는 신문을 한아름 옆구리에 기고 나가는 신애의 발걸음은 사뭇 가볍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신문배달을 한다해서 남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큰집은 대낮에도 대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신문이나 우편물 따위를 바깥에서 그냥 넣을 수 있도록 「우편함」을 달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신애는 자기 집처럼 신문배달원이 집안 현관에까지 들어와서 다정스레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하는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야 알고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그렇게해서 한 반달이나 지났을까요? 신애는 어쩔 수 없이 신문지국장에게 신문배달을 그만 두겠다면서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왜? 고돼서 그러니? 조금만 더 참으면 차츰 경험도 생기고 수월해 질텐데!」
지국장은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신애는 미안한 생각으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애당초 신문배달을 희망한 동기와 지금까지의 일을 정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핫핫… 그래? 알고 보니 내가 어린 너희들에게 속아넘어간 셈이구나? 그러나 너의 그 친구를 위하는 갸륵한 마음이 훌륭하다. 난 정말 감동했다.」
신문사 지국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럴수록 신애는 더욱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것을 귀여운 듯이 바라보고 있던 지국장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는데 며칠후면 지난 달치 신문대금 수금을 해야하니까. 그때는 집집마다 들어가야 되거든, 너희들을 위해서 오는 일요일에 내가 직접 한바퀴 돌테니까, 용수 그 애와 같이 나한테로 오너라. 그러나 설령 그 돌부처를 찾아낸다 쳐도 그 집에서 그냥 내어줄 리가 없는데, 그게 걱정이군」
신문지국장은 근심스런 얼굴을 짓고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 것이었습니다.
「그럴까요? 남의 것을 말없이 가져가고도 임자가 내놓으라는데 안 내놓을까요?」 신애는 뽀로통하여 물었습니다.
「임자라니, 용수가 그 돌부처의 임자라는 말이냐? 다만 먼저 봤다는 것뿐인데…」
「그럼 그 사람은 뭐 임자인가요? 똑같이 임자가 아니라면 먼저 발견한 사람의 권리가 더 많을게 아니에요?」 신애는 눈앞에 그 돌부처님을 찾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기를 쓰고 우겼습니다.
그러자 지국장은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아냐! 법률상으로는 반드시 그렇게는 안되는 거에요, 임자 없는 물건을 먼저 봤다는 것 보다는 먼저 차지했다는게 더 중요한 거라구, 가령 산에 있는 들짐승을 먼저 봤다고 그것만으로 무슨 특별한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거든. 잡아서 내것으로 만들어야지, 핫핫 아무튼 우선 그 돌부처를 찾아놓고 볼일이니까. 오는 일요일 아침 일찍 용수를 데리고 이리로 오도록 해라」
「예, 아저씨 고맙습니다. 그 대신 새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신문은 제가 돌리겠습니다.」 신애는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두툼한 신문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밖으로 내달았습니다.
그러부터 닷새후, 5월 들어 처음 맞는 일요일 이었습니다. 산과 들과 마을에 피었던 " 진달래" "살구꽃" 벚꽃들이 말끔히 지고, 이른 아침부터 내리는 가랑비가 한참 피어나는 파란 어린 잎사귀를 촉촉히 적시는 궂은 날씨였습니다.
「마침 잘 됐군, 이런 날은 사람들이 대개 집에 있게 마련이거든, 핫하…」
지국장은 미안해 하는 둘이에게 이렇게 너털웃음을 쳐보이면서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 그럴싸한 큰집만을 골라서 하루종일 헤맸으나 그 돌부처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용수야, 너 그 이웃마을 아저씨한테 말을 잘 못 들은게 아니냐? 집안에 정원이 있는 집이면 빼놓지 않고 다 뒤졌는데 도무지 그 돌부처님을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맨 끝 집에 가서 지국장이 이렇게 말하면서 머리에 빗물을 닦고 있을 때였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그 집 젊은 아주머니가 불쑥 말참견을 하고 나섰습니다.
「아니? 돌부처님이라뇨? 뭐하러 그런걸다 찾습니까? 우리집에도 하나 있었지만 꿈자리가 사납고 집안에 해롭다기에 가까운 절간에 갖다 줘버렸는데…」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신문사 지국장이 아니, 돌부처님이 있어서 꿈자리가 사납다뇨? 어떻게요?」하고 묻자 그 아주머니는 말하기조차 지긋지긋 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아 글쎄, 그 돌부처를 집에 갖다놓은 그 날 밤부터 어떤 낮선 여인이 꿈속에 나타나 머리밑에서 울지를 않나, 우리 집 꼬마녀석이 시름시름 앓지를 않나, 그래서 점을 쳐봤더니 그 돌부처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글쎄!」하고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니 얼마전 시골 밭둑에서 파왔다는 것이며 크기와 생김새가 용수가 찾는 그 돌부처님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돌부처가 절간으로 옮겨졌다면 영락없이 제집을 찾아든 셈인데, 다시 찾아오기는 더욱 어렵게 됐는걸… 그러나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해 볼까?」 하고 신문사 지국장이 말했으나 용수는 선뜻 따라나서지를 않았습니다. 어쩐지 혼자서만 조용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돌부처님이 옮겨진 그 「백석사」라는 절은 용수네 집에서 오리쯤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절로서 소풍 삼아 한두 번 가본 일이 있어서 용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용수는 그 날 땅거미가 드는 석양 무렵 혼자서 그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절에도 용수가 찾는 돌부처님은 없었습니다.
돌부처님을 옮겨다놓은 그 날부터 절의 주지스님이 앓아눕는등, 흉사가 겹쳐서 앞(운천방죽) 물 속에 내다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낯모른 인부를 시켜 한일이라 내다버린 장소도 알 수 없다는 주지스님의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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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별배
이 고을 어느 청백리(淸白吏)이야기
전라도사(全羅道事)로 새로 도입한 조공(趙公)은 나이는 아직 젊지만 성품이 칼날같이 예리하고 엄격하였다.
「오늘도 동헌 뜰 은행나무 가지에 공방(工房)아전의 목 하나가 걸렸다며?」
「어제는 수통인(首通引) 한사람이 그랬대!」
「내일은 또 뉘 목이 대롱거릴까? 아 무서워!」
이런 소문이 광주 고을 안에 퍼지자 관아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가(民家)에서까지 밤중에 불이 꺼진 것처럼 으스스 찬 기운이 돌았다.
「정소죽은 아직 안 오느냐? 왜 이렇게 늦을꼬? 」 조공은 미닫이 문을 열고 옆방에 대령하고 있는 계집종 연옥에게 물었다. 「아직 오시지 않으셨사옵니다.」듣기에도 시원스런 서울 말씨였다.
「몹시 늦는구나. 오는 즉시 이리 들도록 하여라」
좀처럼 웃는 일이 없는 사또마님. 오늘은 유독 심기가 좋지 않는 듯 싶던 그가 방긋거리는 것을 연옥은 이상히 여기며 그 앞을 물러서려고 하자. 「아! 너 이리 와서 좀 앉아!」하고 그 방으로 가까이 불러 앉혔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난 후 「너 서울로 가고싶지?」 하고 물었다. 감싸듯 부드러운 정겨운 말투였다. 「네」
묻는 조공의 얼굴표정의 심각함에 비해 너무나 간단하고 짤막한 그녀의 대꾸였다. 「음 그럴테지!」 말끝에 좀 섭섭한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한참 후 되씹는 듯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옳아 가고 싶은 게다. 교활하고 간사한 수전노들만 우굴거리는 이 곳 관아(官衙). 도둑과 거러지를 합쳐서 둘로 나눈 것 같은 그런 놈만 있는 내 주위에서 어서 떠나고 싶을거야.」
조공은 독백(獨白)처럼 이렇게 내뱉고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연옥은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안했지만 그런자(탐관오리)들에 사정없이 철퇴를 내리고 있는 사또 마님이 그지없이 좋고 자랑스러웠다.
얼마 후 일단 물러갔던 연옥이가 다시 돌아와서 내객(來客)을 알렸다. 조공에게는 이 지방에서는 유일한 지기(知己)이며 말동무인 한의사 정소죽이 온 것이다. 「왜 이렇게 늦어?」
「오라시는 용무가 별로 긴치 않은 것 같아서요. 의사는 환자가 더 중하지 원님의 말상대 같은건 그 다음 일이 아닙니까?」 웃지도 않고 하는 정소죽의 스스럼없는 말대꾸였다.
「그만 둬, 자네씨의 그 명분론(名分論)에는 늘 가시가 돋쳐있거든. 핫핫」
조공은 정소죽의 아첨이 없는 담백 소탈한 성품이 그지없이 좋았고 명의(名醫)로 이름이 나있는데도 삼간 초가에서 청빈(淸貧)하게 산다는 그 생활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말하자면 의기투합(意氣投合)한 그러한 사이였다.
그가 중앙(中央)의 어떤 내직(內職)에 있다가 이곳 전라도사로 옮겨온 후 석달-.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모두 언짢고 거슬리는 것뿐인데 정소죽 이 사람만은 단 하나의 예외였다.
곧 조촐한 주안상이 나오고 연옥의 시중으로 단 둘이만의 술자리가 벌어졌다.
「이건 함평에서만 나는 백어(白魚)인데 이 귀한 것을 어떻게 구하셨지요? 이러한 진선(珍膳)을 늘 상미(嘗味)하신다니… 과연 원님벼슬이 좋긴 좋군요. 이것도 남도에 오신 덕분 아닙니까?」
정소죽은 충청도 태생으로 극도의 이 지방 혐오증(嫌惡症)에 걸린 듯 싶은 조도사를 얼르는 말투로 조금은 「비양」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하긴 이런 싱싱한 백어는 임금님도 잘 못 잡수지!. 생선만은 이곳 것이 좋거든….」
「어찌 생선뿐인가요, 인걸(人傑)은 또 어떻구요? 이 고장 출신 박눌재 박사암 기고봉 어디 더 헤어볼까요? 밑천이 딸린가?」
「허허!, 이사람 또 향토자랑이 시작되는 구먼 의술(醫術)은 변변치 못하면서 보학(譜學)만은 제법이거든 핫…」
이렇게 해서 거리낌없는 정담이 오가는 가운데 정소죽은 요즘 수하(手下)아전에 대한 추죄(追罪)가 너무 가엄(苛嚴)하다는 항간의 소문을 있는 그대로 간언(諫言=충고)을 했다. 조사또의 노여움과 꾸지람까지를 각오한 마음으로 부터의 충언이었다.
그러나 조공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공이 서울에서 착임하던 날 , 그러니까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선례(先例)에 따라 많은 관속(官屬)들이 장성경계까지 마중을 나갔었다.
가을철 좀 차가운 날씨에 검은 무명배 「고의적삼」에 관복(官服)을 걸친 신관(新官)사또의 너무나 검소한 옷차림에 마중 나온 이속(吏屬)들은 대경실색(大驚失色)을 했다. 값진 비단으로 감싼 자기네들의 사치스런 복색(服色)이 너무도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라했다. 가마에서 내린 조사또는 앞에 늘어선 수하 이속들에게 즉석훈시를 했다.
「이처럼 먼 곳까지 마중을 나와 주어서 고맙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런데 한가지 미리 일러둘 것은 빙공영사로 사복(私服)을 채우거나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있으면 나는 결단코 용서를 않는다. 이 지방의 아전들은 대개가 치부(致富)를 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사치스럽게 잘입고 지내는 줄은 미처 몰랐다. 어쩐지 오늘부터 내 자신이 무슨 "광대"나 "기생오라비"의 우두머리라도 된 것 같구나.」
훈시라기 보다는 지독한 「야유」와 「통갈=으름짱」이 곁든 일종의 폭탄선언이었다. 조공은 신임 초부터 기강(紀綱)을 세우기 위한 대수술을 거침없이 단행했다. 그것은 비단 수하아전들에만 그치지 않고 지방세도가나 「고장양반」들에게까지 미치는 아주 엄정(嚴正)하고도 철저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고 비리부정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지위의 고하나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엄벌로 다스렸다.
그는 조상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손꼽히는 「양반」이었지만 놀고 먹는 양반이라는 자들을 몹시 혐오(嫌惡)했다. 그 중에서도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애잔한 백성들의 등이나 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지방토호들의 「도둑놈」오장이 뒤틀리도록 미웠다. 도임 후 3개월 동안에 그런자들 (수하이속을 포함해서)을 잡아 족치고 물고를 냈다. 그동안 죽어서 효수(梟首 = 목을 베어 나무같은데에 매닮) 된 자의 수효만 해도 열 명을 넘었다.
그 중에는 시정 무퇴배들과 어울려 투전판(도박판)이나 벌리고 부녀자(婦女子)를 희롱 강간하는 행패를 일삼던 전직고관(前職高官)의 자제가 두 사람이나 끼어있었다. 정소죽을 상대로 밤늦도록 술잔을 나눈 조공은 아무리 마셔도 취기는 돌지 않고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만 갔다.
「소죽 자네 눌재 박상선생이 이곳 도사(都事)로 계실 때 나주 사는 우부리를 쳐죽인 그 일화(逸話)를 잘 알지?」
「알구 말구요, 그런데요?」
「그 박선생을 구했다고 고양이가 오늘 낮 잠깐 눈을 부친 꿈속에 현몽을 했거든, 그것도 장성갈재 바로 그 곳에서 말일세!」
「호 그것참 길몽(吉夢)인걸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사또어른 옷자락이라도 물어채든가요?」
「아니야, 그게 아니고 나를 보자 산위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더군…」
「사또께서 왜 그곳을 지나셨을까요? 무슨 일로…」정소죽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공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순간 조공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술맛이 쓰게 느껴지는건 어쩔 때 그런 걸까? 의사인 자넨 그 이유를 알게 아닌가?」
「술은 본래가 쓴게 아닙니까, 그게 정상이죠, 반대로 달게 느낄때는 미각기관에 이상이 있는거구요, 우리 그리 되기 전에 그만 납배(拉杯)를 하시지요」
「그럴까? 자네씨와의 마지막 별배(別杯 = 이별의 술잔)가 이렇게… 좀 미련이 남지만 그만두지」
조공은 손에 든 술잔을 비우고 섭섭한 눈빛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지그시 감은 두 눈에 배인 눈물이 양 볼을 적시고 방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소죽은 그 같은 조공의 거등에서 중대하고 불길한 뭔가를 직감했다. 굳세고 담대한 그에게 여간해서는 그 같은 거조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까닭을 물을 처지도 아닌 것 같았다.
한참 후 조공은 결연(決然)한 말투로 「내일 서울에서 귀한 손님 한 분이 날 찾아 내려오시네. 아마도 "약사발(사약)"을 들고 말일세.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이 사람을 죽였거든…」하고 호탕하게 웃고 나서 이윽고 정색을 하며
「정공, 내 저승에 가서도 자네씨와의 깊은 정리만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어! 그런데 한가지 연옥이 그 아이를 꼭 자네씨 힘으로 무사히 서울로 보내주도록 이것만이 나의 간절한 부탁일세」 하고 고개를 숙였다. 순간 정소죽은 두 손을 모아 방바닥에 엎드리고, 옆방에선 계집종 연옥이의 처절한 오열(嗚咽)이 터져 나왔다.
※ 후기 람형(함부로 형벌을 함)의 탄핵(관리의 죄과를 임금에게 아룀)을 받고 사약을 각오한 조공은 유배로 끝나고 그후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큰 전공을 세운후 금산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
애정무한
사랑은 「피보다도」진했다.
옛날(고려말기) 이 곳 벽진동 산촌 마을에 탁씨(卓氏)라는 거부(巨富) 한 사람이 떵떵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그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민하고 있던 중 장성 땅에 유명한 「점장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점장이를 불러들여 점을 치게 했습니다. 점장이는 딱하다는 듯 살래살래 고갯짓을 하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년 후, 아드님 하나를 얻게 되지만 오래 살지는 못하겠어요. 정말 안됐군요」하면서 후하게 내놓는 「복채」도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로부터 일년 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점장이의 예언대로 「셋 이레」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비탄에 잠긴 탁부자는 그 잠장이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 결과는 「또 아들하나를 낳고 요절(夭折)만은 면하지만 그 나이 열세 살이 된 동짓달 초하룻날 집을 나가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5년을 지낸 뒤에 돌아와야 목숨을 잇고 장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탁부자의 집에는 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탁부자는 그 아들이 열세 살 난 그 날이 되자 점장이의 말대로 노자 한푼 없이 금싸라기 같은 귀여운 아들을 집에서 내보낼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 아들은 거지가 되어 문전걸식을 해가며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다가 보성 땅 어느 집에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5년이 되는 날의 밤이었습니다. 탁부자 아들이 살고있는 그 집에 귀신이 나타나서 탁부자의 아들을 붙잡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탁부자 아들을 남몰래 사랑하던 주인집 딸이 그를 안방 뒤주 속에 숨겨놓고 열쇠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은 그 처녀의 먼 조상이었으니… 귀신은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점잖은 노인으로 변신하면서 「내가 너의 칠대 할아버진데 윗대 선조의 원한을 갚기위해 하는 일을 네가 막다니… 그래서 되겠느냐, 어서 그 열쇠를 내 놓아라」하고 타일렀지만 그 집 딸은 영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닭이 울자 귀신인 처녀의 칠대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면서 「계집아이는 이래서 헛식구란 말이거든」하고 잠들어 있는 그 집 주인을 흔들어 깨워놓고 「저년을 얼른 탁가놈 집으로 보내버려!」하는 알쏭달쏭한 분부를 남기고 허겁지겁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 탁부자 아들은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데… 그 부인은 조상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일생동안 한번도 친정에 발을 들여놓지 안 했다고 합니다. -
염량의 계정
그 옛날 선거(選擧)풍경,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때는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이곳 ○○동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소심하고 선량하기만 한 가구점(家具店)주인 정초동은 하는 일 없이 방안에 앉아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실은 전날 밤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이어서 제사를 모시고 늦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작고하신 어머니도 만나 뵙고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던 것입니다.
「곧 얼마 있으면 따뜻한 봄이 오고 그때가 되면 일감도 생길 테고 몸도 이렇게 건강하니, 나는 정말 행복한 놈이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고 그 중에서도 유독 자기를 이 세상에 있게 해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불현 듯 샘솟았습니다. 변변한 유산(遺産)하나 없이 어릴적부터 남의집 공장 직공으로 내쳐져 고생만 시킨 부모님인데…
그러나 그런 일은 다 잊혀지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영혼(靈魂)의 가호(加護)」까지를 없다고 할 만큼 영악하지도, 모질지도 못하는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발소 주인 성가와 고물상 김사장(실은 전당포주인) 그리고 그와는 종씨집안인 정약방 이었는데 그들은 다같이 이번 국회의원선거에 ○○당 후보를 출마한 김모를 위한 열렬한 「선거운동원」이었습니다.
이발소 주인 성가가 그일 때문에 아예 가게 문을 닫고, 정약방은 평소에는 온순한 성품인데 선거때만 되면 사람이 달라진 듯, 잘 흥분하여 남들과 곧잘 입다툼을 하는 과격파(過激派)로 백팔십도 변신(變身)을 했습니다. 또 한사람, 고물상 김사장은 평시에는 좀 성급하고 거치른 성질인데, 이 선거때만은 아주 차분한 사람이 되어 선거운동차 남의 집을 찾아가면 끈덕지게 늘업 붙어 설득에 열을 올리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입버릇처럼「언제까지 나는 남의 선거운동원으로 남의 깃대만 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시기가 오면 나도 당당히 출마를 해서 원내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 그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하고 호언장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동네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면서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흥, 돈만 있으면 아무나 국회의원이 되는가, 도둑물건 싸게 사들여 남 못할 짓 해서 치부한 무식한 주제에…」 남을 헐뜯을 줄 모르는 정막동도 그말 만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4년이 지나고 또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전번 선거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입후보를 했는데 그 속에는 전당포주인 김사장도 끼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정막동의 집에도 후보자들과 그 운동원이 찾아들고 고물상 김사장 본인도 두 번이나 찾아와서 「자네만 믿네」하는 소리를 되풀이하면서 꾸벅 큰절까지 하고 돌아갔습니다. 말투부터가 전과는 달리 석 유순하며 차라리 구걸을 하는 「거러지 처럼」비굴하였습니다.
딴때는 그렇게 기세가 대단한 사람이… 정막동의 눈에는 다릿목에 손을 벌리고 앉아있는 장님을 볼 때처럼 김사장이 가엾고 불쌍했습니다. 순박하고 얼뜬 그에게는 측은하고 불쌍하다는 그 마음이 바로 지지(支持)에로 직결(直結)되기가 쉬운 것인데…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정막동의 그 조그만 가구점에 낯모르는 어떤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반짝반짝한 가죽(모피)코트에 자가용 차를 탄 중년부인이었습니다. 같이 따라온 이발소 주인 성가의 말이 이곳 광주태생으로 서울에서 큰 회사를 차리고 있는 이모사장 부인인데 그 이사장이 이번에 △△당 공천으로 출마를 했다는 것입니다.
「당은 다르지만, 뭘로 보나 그분 밖에 없다고 생각되서 그분을 밀기로 했다.」며 그 부인 앞에서 전에 같이 일했던 이번에 출마한 고물상 김사장의 험담까지 늘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사장부인은 돌아가면서 「하얀 봉투」하나를 땀내 나는 헌 누더기 요 밑에 밀어놓고 갔습니다. 문밖에 내바람 나간 그 집 마누라 손을 움켜쥐고 다정스레 귓속말도 해주고…
그런데 그 날 석양부터 가구점 주인 정막동은 온몸에 오슬오슬 한속이 들어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거 어쩌지? 투표는 꼭 해야 하는데, 병원에 갈 형편도 못되고…」
정막동은 호되게 닥달을 당한 죄인처럼 얼굴을 찡그렸으나 다급한 판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이 사는 낯익은 의사를 불렀습니다. 왕진 온 의사는 진찰과 치료를 끝낸 후 가방을 닫으면서
「가벼운 몸살감기요, 곧 나을거요, 그런데 투표는 누구에게 하시렵니까?」하고 넌지시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얼른 대답을 못하자
「이곳 시내 출신은 아니지만 신○○ 후보에게 부탁드립니다. 농촌출신으로 때묻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고 나와는 고등학교 동창입니다」하면서 치료비를 반으로 깎아주었습니다. 투표일이 되었으나 정막동의 신열은 좀처럼 내리질 않았습니다.
찬바람도 불고 마음은 영 내키질 안했지만 그간 부탁 받고 신세진 연유도 있고하니 소심하고 착실한 정막동의 의리상(?) 투표소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표를 찍을까 망설이다가 투표소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결심이 섰습니다.
자기표는 의사선생이 권한 신○○에게 주고 마누라 것은 돈 봉투를 놔두고 간 이사장에게 주어서 나름대로 공평하게(?) 신세를 갚자는 것입니다. 그 뜻을 같이 간 마누라에게 이르고 막 투표장에 들어가려는데 누가 등뒤에서 그의 손을 꼭 움켜 잡았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종씨 정약방 이었습니다.
정약방은 그를 집 모퉁이로 끌고 가서 신○○에게 꼭 찍어달라고 신신부탁을 하면서 이발소주인 성가처럼 고물상 김사장에 대한 욕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막동은 슬며시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무나 누구를 미는 것은 좋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그것도 얼마 전까지 같은 당을 하면서 고생을 같이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의분심이 그의 좁은 가슴을 옥 질렀습니다. 정막동은 「자네만 믿네」하던 전당포주인 김사장의 말을 귓전에 들으면서 그 이름 밑에 붓 대롱을 꼭 눌렀습니다.
다음날 판명된 선거결과는 서울 사는 이사장의 당선으로 낙찰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습니다. 전날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사장 부인, 아니 「이의원 사모님」이 당선인사차 그곳에 들려 정막동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이발소 주인 성가를 길들인 강아지처럼 데리고 말입니다.
성가는 무턱대고 고맙다는 말을 연발함으로써 자기 공을 내세우려 했고, 남편 말에 따라 이사장에게 한 표를 던진 그 집 마누라는 그것을 알고 찾아주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이의원 사모님은 전날과는 달리 사뭇 달라진 거만한 표정으로, 얼굴까지 붉히고 반가워하는 그 집 마누라에게 무슨 큰 은혜나 베 푸듯 다정스럽게 웃어주고 병석에서 일어나 앉은 정막동에게는 흘끔 모멸의 눈길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
용이 된 잉어할머니
용이 된 잉어할머니
이 고장 세하동 동하 마을 앞 조용한 연못 속에 나이 많은 「잉어」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연못 속에는 「붕어」「메기」「가물치」「송사리」같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지만 자기와 같이 비늘이 노랗고 눈자위에 새까만 얼굴을 가진 물고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 외롭고 쓸쓸하기는 했지만 그윽한 연잎향기를 맡으면서 넓고 깊은 물 속에 마음껏 헤엄쳐 놀 때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도록 즐겁고 흐뭇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비단같이 보드랍고 매끈매끈한 창포 잎을 깔고 잉어가 이제 막 잠자리에 들려는 참이었습니다. 평소에 자기를 친할머니처럼 따르던 새끼붕어 한 마리가 허겁지겁 찾아와서 「할머니 큰일났어요. 제 동생이 실에 달린 지렁이를 빼먹다가 하늘로 올라간 채 영 돌아오질 않아요, 엄마 아빠는 저녁도 안 드시고 울고만 계셔요.」하며 울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거 참, 야단났군. 계가 사람이 담근 낚시를 문 게로군!」 잉어할머니는 쩍 쩍 입맛을 다시면서 붕어 집으로 달려가 붕어 엄마 아빠를 위로하는 한편 자신이 겪은 다음과 같은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고 십여 년 간을 이렇게 홀로 살구 있어요. 그것은 어느 따뜻한 봄날의 일이었어. 어린 나는 어머님과 아버님 사이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내 몸에 섬뜩한 손길이 와 닿더니,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캄캄하고 좁디좁은 바구니속에 갇히고 말았어. 그 속에는 나의 부모님말고도 여러 가지 물고기들이 수없이 갇혀있더군. 나는 두려움과 목마름에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울고만 있었지.
그러자 아버님 어머님이 비좁은 틈을 헤집고 내 옆으로 오시더니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우리는 지금 인간이라는 아주 고약하고 잔인한 족속의 손에 붙들린 거다. 그러니 우리 어른들은 도저히 살아날 길이라곤 없고 나이 어린 너만은 어쩌면 살아날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워낙 욕심이 많고 약아빠져서 어린 너희들을 더 키워서 잡아먹을 궁리를 하거든.
요행이 네가 살아나거든 이 연못을 떠나 너희 외가가 있는 이 앞들 "넓은 냇"으로 가거라. 얼마후 장마철이 되어 방죽 물이 둑을 넘거든 그 물줄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알았지?」하시면서 아버님은 얼굴을 옆으로 돌려버리시더군 그동안 어머니는 내 볼에 자기 얼굴을 부비시면서 울고만 계셨구
잉어할머니는 그때의 슬픔이 되살아난 듯 한동안 말이 없다고 목멘 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그 얼마 후 아버님의 말씀대로 이 연못 속에 다시 던져지고 그 후 사람들에게 부대끼고 같은 동족들의 시달림을 받아가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외갓집을 찾아 헤맸지만 모두가 허사가 되고 다시 이곳에 돌아와서 홀로 살다가 이렇게 늙어 버렸어!. 알고 보면 우리네 사회에서 온 식구가 오붓이 모여 살기를 바란다는 건 애당처 잘못생각인지 모르지!"
그 후 그 연못에는 잇달아 그런 일이 생겨 견디다 못한 물고기들이 그 방죽안에 제일 어른인 잉어 할머니를 모시고 그 대책을 의논하는 회의를 열게 되었습니다. 회의시간이 되자, 창포 꽃이 노랗게 물가를 수놓은 연못가로 붕어 날치 피라미들이 긴장된 얼굴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항상 사이가 좋지 않은 메기, 가물치, 뱀장어들의 얼굴은 끝내 그 곳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잉어할머니는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꽃향기 그윽한 이 아름다운 연못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은 오직 인간이라는 욕심 많고 고약한 동물이 우리가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큰 야단이 났소」 하고 말머리를 꺼내는 참이었습니다.
성미가 급한 「날치」가 그 뾰죽한 주둥이로 다른 물고기들을 떠밀고 나오면서 「아니, 잉어할머니, 거참 답답하지 않소? 무턱대고 야단났다고 하실 게 아니라 어쩌면 좋다든가 어떻게 하자든가, 그 방법을 말씀해야 할게 아뇨?」
그러나 잉어할머니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길은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이제까지 먹지 않았던 지렁이 같은 것을 일체 입에 대지 않으면 되는 거요, 더욱이 미꾸라지나 송사리 같은 우리들 동족을 잡아먹는 고약한 못된 버릇부터 고쳐야 하오」 차근차근 말을 계속하려는 참이었습니다.
이때 연잎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개구리가 그 옆을 나는 파리 한 마리를 날름 채먹고 쩍쩍 입맛을 다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건 가물치나 매기영감더러 물어보라지, 개굴 개굴…」 잉어할머니는 물고기도 아니면서 맘대로 물 속을 휘젓고 다니며 어린 물고기들이나 건드리다가 훌쩍 육지로 도망쳐 버리곤 하는 이 얄미운 놈에게 물장구를 한번 쳐주고 나서 말을 계속하려 할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배가 복쟁이처럼 볼룩하고 쭉 째진 입가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수염 까지단 「자가사리」가 입을 벌름거리면서 말참견을 했습니다.
「저 잉어할머니, 전 그 말씀에 불만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생고기만 먹고 사는 놈인데, 그리되면 나 같은 놈은 아주 굶어죽어 버리란 말씀과 다름이 없잖소. 하루종일 다방에 앉아 맹물마시고 사는 일없는 인간들도 아침밥만은 먹고 나오는데… 아무런들 내가 그들만도 못하다는 말요? 내참…」
자가사리는 그 무지스런 까만 얼굴에 제법 핏기까지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잉어할머니는 조금도 내색이 없는 조용한 말투로 「이 연못 속에는 우리끼리 아웅다웅 싸우거나 서로 잡아먹지 안해도 먹고 살 것은 얼마든지 있어.
산에서 흘러내리는 고소한 나무열매, 풀잎에서 떨어지는 갖가지 벌레들, 그리고 연잎 위에 진주 알처럼 고였다가 굴러 내리는 맑은 물방울, 나는 한평생을 같은 동족을 조금도 괴롭히지 않고 그런 것만 먹고 지금까지 살아왔어. 너도 이제부턴 같은 동족까지를 해치는 그 고약하고 모질스런 짓은 하지말고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한층 목청을 돋구어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곳의 안녕과 평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 자신의 목숨까지도 지탱할 수 없을 테니 깊이 명심하시요」하고 말을 맺었습니다.
"옳소! 옳은 말씀이요"
그 자리에 모인 물고기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잉어할머니의 말에 따르기로 굳게 맹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 없었던 「가물치」「메기」「뱀장어」들은 자가사리"가 일러바친 그 소식을 듣고 코웃음을 치며 제깐것들이 뭐! 남을 잡아먹을 만한 힘이나 있어! 맨 날 쫓겨만 다니는 주제에…」
「흠, 나무열매나 맹물만 먹구산다구? 옛날 공자님도 미처 못했던 소릴 골라서 하는구먼 정말 아니꼬아서…」
「차라리 잘 됐지 뭔가? 그치들이 안 먹으면 그만큼 우리들 몫이 많아 질게구, 이런걸 보구 굴러 들어온 떡이라는 거야!」하며 제각기 한마디씩 빈정거리면서 입을 삐죽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잉어할머니 말씀에 순종한 물고기들은 지렁이를 무는 일이 없어져서 이 곳을 찾는 낚시꾼들은 먹이를 지렁이가 아닌 미꾸라지나 개구리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못 속에 살던 가물치, 메기, 뱀장어와 같은 생고기 좋아하는 사나운 물고기들은 앞을 다투어 그것을 물고 채다가 간 곳이 없어지고, 그곳에는 오랜만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여러 번 연꽃이 피고 지고 많은 세월이 조용히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잉어할머니는 그 곳 모든 동족 물고기들의 존경과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고 있던 어느 가을날의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일고 그 연못을 내리덮더니 「용이 된 그 잉어할머니를 감싸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광경을 본 것은 연잎 위에 앉아 낮잠을 자고 있던 「개구리」뿐이었습니다. 평소에 말썽꾸러기 「개차반」으로 이름난 그놈도 용이 되어 승천하는 잉어할머니의 그 장엄하고 거룩한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만 넙죽 큰절을 했습니다. 개구리가 공손히 앞발을 모으고 엎드려 절을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
읍궁암
읍궁암(泣弓岩)의 푸른이끼
옛날 학자(學者)들은 대개 성품은 청직(淸直)하지만 그 행동이 우유부단(優柔不斷)하고 연약한 것이 흠이었다. 안다는 것이 자칫 이성(理性)에만 치우쳐서 결단(決斷)을 저해하고 고고(孤高)한 채 세상을 달관(達觀)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장(서창)이 낳은 한말의 명유(名儒) 현화 고광선 선생은 그 범주를 벗어난 굳굳한 인물이었다. 선생은 태생지인 압촌 마을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소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의하여 일본과 보호조약이 맺어지고 민영화 조병세등 지사(志士)둘의 자결소식을 듣고 분격한 나머지 홀로 압촌을 떠나 서창면 용두동 봉황산(鳳凰山)중턱에 초막을 짓고 은거의 숨은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학덕(學德)을 기리는 이 지방 선비들이 그대로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어느새 그의 산중처소(山中處所)에는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봉황 산 일대는 글 읽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학문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구국(救國)의 지절(志節)을 일깨우고 선비의 덕의(德義)와 사변(思辨)을 가르쳤다. 선생이 머문 봉황산 중턱에 왕릉처럼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다. 국권회복(國權回復)을 획책하다가 슬픔 속에 가신 고종임금을 몹시 흠모(欽慕)했던 선생은 그 바위를 고종임금의 능묘(陵墓)로 삼고 조석으로 그 앞에 꿇어앉아 곡(哭) 하기를 3년.
그 눈물자국은 파란 이끼가 되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으니… 그 충절은 가위 만인의 귀감이라 할 것이다. -
주역각시
주역(周易) 각시
이 고장 서창동 회산마을 출신 임란공신(壬亂功臣) 회재 박광옥(朴光玉)선생에게 대단히 영특(英特)한 따님이 한 분 있었는데 글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고 짐승의 말소리(?)까지를 알아듣는 신통한 재주를 지녔었다.
그녀 나이 과년(瓜年)(여자나이 15?6세 때를 이름)이 되어 전북(全北) 남원(南原)의 명문(名門)인 노씨(盧氏)가문(당주(堂主)의 노정은 이조판서를 지냈음)에 출가를 했는데... 결혼 첫날밤 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웃은 것이 화근이 되어 시집에서 퇴박을 맞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필경 처녀시절에 정숙한 남자가 있어 그 사람을 생각하고 웃었다는 엉뚱한 트집이었다. 하기야 그때 당시의 풍습으로 갓 시집온 양가(良家)집 규수가 신혼 첫날밤에 웃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며 개화된 지금 세상이라도 조금은 말썽이 될 법한 일이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밑쳐진 채 친가에서 앙완(怏椀)의 한세월(閒歲月)을 보내는…그래서 남편과의 접촉이 일체 끊어진 상태에서 그 억울한 원왕을 씻을 길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의 일이었다. 나뭇잎들이 짙은 초록빛으로 물든 초여름 어느 날, 시아버지 노정공이 불쑥 이곳 사돈댁을 찾아왔다. 사돈 박극제 선생과는 전부터 친숙한 사이로 자식들간의 불합(不合)은 그렇다 해도 옛 친구의 두터운 정리까지를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공(盧公)은 사돈댁에 오는 길초 어느 주막집에서 쉬고 있는데 그 집 툇마루에 떨어져있는 「제비새끼」한 마리를 무심결에 도포속에 넣고 왔다. 노공은 자부(子婦)의 인사를 받고 차려 내온 술잔을 손에 들면서 사돈 박공에게 사과겸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영조(英祖)임금께서는 아드님 장묵세자(莊?世子)를 뒤주 속에 가뒀지만 우리야 어디…」하고 씁쓸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아내를 퇴박한 아들을 탓하고 자신(自身)의 무위(無爲)를 자책(自責)하는 말이기도 했다. 박공(朴公)은 그저 쓸쓸히 웃을 뿐 말이 없고 방안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다소곳이 꿇어앉아 술시중을 들고 있던 박부인(朴夫人)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말투로 「아버님, 어서 약주 잔 드셔요. 그리고 그 아버님 도포 속에 제비새끼를 놓아주십시오. 어미가 저렇게 울고 보채고 있질 않습니까」하고 앞마당 빨래 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과연 거기에는 어미제비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슬픈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노공은 조용히 일어서서 도포 속에 넣고 온 제비새끼를 꺼내어 마루바닥에 놓아주었다.
그러자 어미제비는 재빨리 그것을 입에 물고 날아가고… 그래서 박부인에 대한 혐의(?)는 완전히 풀리고 신원(伸寃)은 되었지만 시가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그녀는 일생을 친정에서 지내면서 아버지를 도와 막대한 가산(家産)을 이루게 하고 그 재산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많은 창의(倡義)를 도우는 등 큰 공훈을 세우게 했다. 그녀가 임종에 즈음하여 유언하기를 「나는 끝내 친정에서 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히지만 시집 7대손이 이장을 해갈 것이니 그 때까지만 잘 부탁한다」하고 눈을 감았다.
과연 그 말이 적중하여 지금은 남원(南原)땅 노씨 문중 선산에 묻혀있는데 사서는 물론 극역까지를 통달하여 만물을 지기하고 심지어 짐승의 말소리까지를 알아듣는 재능(才能)을 추앙하여 세칭 「주역각시」라는 칭호로서 지금도 널리 인구(人口)에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