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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옥 < 朴光玉 (1526∼1592) >

陰城人(음성인), 조선조 明宗(명종) 宣祖(선조)때의 功臣(공신), 號(호)는 懷齊(회제) 司藝(사계) 朴鯤(박곤)의 아들로 西倉面(서창면) 梅月洞(매월동) 회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0세때부터 遊軒(유헌) 丁愰(정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21세 때 生員進士(생월진사)가 되어 內職(내직)으로 內侍敎官(내시교관), 吏曹正郞(이조전랑), 承議部主簿(승의부주부)를 지냈으며 雲峰縣監(운봉현감)으로 在任中(재임중) 49세 때 文科(문과)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고 全羅都事(전라도사), 忠淸都事(충청도사), 영광군수, 羅州牧使(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나주목사로 있을 때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적병과 싸우고 있을 때 수천의 의병과 수백 석의 군량미를 보내어 大勝(대승)케 하였고 湖南(호남), 湖西(호서)에 있어서는 金千鎰(김천일), 高敬命(고경명), 倡義隊(창의대)에 子第(자제)들을 가담시키고 군량을 많이 보내니, 宣祖王(선조왕)은 그에게 湖南(호남)의 忠義臣(충의신)이라 극찬하였다.

그는 文學(문학)에도 才質(재질)이 뛰어나 大東風土(대동풍토)에 曰(왈) 湖南(호남)즉 朴懷薺(박회제), 寄高峰(기고봉) 朴訥齋(박눌재), 朴思菴(박사암), 以道學(이도학) 이於世(이어세)라 하였다.

김세근 < 金世斤 (1550∼1592)>

金海人(김해인), 號(호)는 揷峰(삽봉)으로 宣祖(선조)10년에 문과에 급제, 宗簿寺主簿(종부사주부)벼슬을 지내면서 外侵(외침)에 대비한 養兵論(양병론)을 주장하다가 용납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 뒤 西倉面(서창면) 세하동 세동마을로 옮겨온 후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自己(자기)가 기른 壯丁(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秋城會盟(추성회맹)에 참가하여 柳澎老(유팽노), 金德弘(김덕홍), 安瑛(안영) 등과 더불어 高敬命(고경명), 擧義隊列(거의대열)에 합세하여 도처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陳中(진중)에서 病(병)을 얻어 歸鄕療病中(귀향요병중) 스승인 湖西義兵(호서의병)장 趙憲(조헌)의 부름을 받고 病(병)든 몸으로 다시 出征(출정) 全州(전주)에서 軍營(군영)을 정돈하던 중 적병이 錦山(금산)으로 侵入(침입)한다는 수식을 듣고 急(급)히 錦山(금산)으로 가서 奮戰中(분전중) 臥坪(와평)에서 고경명과 같이 殉節(순절)하였다.

김극추 < 金克秋 >

本貫(본관)은 金海(김해)이며 호는 節峰(절봉), 直提學(직제학), 金馹孫(김일손)의 曾孫(증손)으로 1552년 4월 8일 서창면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公(공)은 勇力(용력)이 뛰어나고 經史(경사)에 통달한 文武(문무)를 아울러 갖춘 선비로 이름이 알려져 당시 光州牧使(광주목사)권률도 그를 중히 여기던 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을 때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처음 梨峙戰鬪(이치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그 勳賞(훈상)으로 訓練院主簿(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에 漢城參軍(한성참군)이 되었다가 定虞衛別武士(정우위별무사)로 선발되어 權慄幕下(권율막하)에 다시 들어가 활약할 때 定忠信(정충신), 李忠立(이충립), 高成厚(고성후), 李浣根(이완근), 李世環(이세환), 朴大壽(박대수), 金致源(김치원) 등과 光主八壯士(광주팔장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

그 후 특진하여 內職(내직)으로 兵曹佐郞(병조좌랑), 軍器僉正(군기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판관(경성판관), 海美縣監(해미현감)을 거쳐 永川郡守(영천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파면당하니 그를 따르던 郡民(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軍資監正(군자감정)이 되었다. 1605년에 宣武厚從三等功臣(선무후종삼등공신)에 策錄(책록)되었다. 그러나 임진 왜란때 입은 충산의 腫毒(종독)이 퍼져 1610년 1월 9일 향년 59세로 졸하였다.후에 左承旨(좌승지)를 增職旌閭(증직정여)를 命(명)하여 光山牛山洞(광산우산동)에 있는 三綱旌閭(삼강정여)

황 호 < 黃 顥 >

長水人(장수인)으로 호는 南齊(남제) 서창면 풍암동 운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大凡英邁(대범영매)하여 글을 잘했으며 壬辰倭(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의병을 이끌고 兵使(병사) 李福南(이복남)의막하에 들어가 각지를 轉戰(전전)하면서 전공을 세웠으나 南原(남원)에서 적 대군을 만나 분전 중 순절했다. 亂定後(난정후) 禦侮將軍(어모장군) 및 判決事(판결사)의 贈職(증직)이 내려졌다.

박대수 < 朴大壽 >

忠州人(충주인), 1533년 西倉面(서창면) 절골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赤梁萬戶(적량만호)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만나자 權慄(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參謨官(참모관)이 되어 金山(금산) 梨峙戰(이치전)에서 戰功(전공)을 세웠다.

박희수 < 朴希壽 >

忠州人(충주인), 1540년 서창면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회재 朴光玉(박광옥)의 문인이며 벼슬은 刑曹佐郞(형조좌랑), 咸列縣令(함열현령)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장의 하여 義州(의주) 行在所(행재소)를 왕래하면서 큰 공을 이루어 原從功臣(원종공신)으로 록훈되었다.

박지효 < 朴之孝 >

本貫(본관)은 忠州(충주),1553년 서창면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글을 奇大升(기대승)에게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40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高敬命(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활약하였으며 1627년 丁卯胡亂(정묘호란)때 金長生(김장생)이 三南號苕使(삼남호초사)로 광주에 내려와 公(공)에게 募兵有司(모병유사)의 責任(책임)을 맡기자 75세의 노구로 兵糧募聚(병량모취)에 큰 성과를 올렸고 全州(전주)에 피난중인 世子(세자)를 府內(부내)로 맞아들여 礖山(여산)까지 護送(호송)하니 仁組(인조)가 이를 賞揚(상양)하여 遺逸職(유일직)인 掌禮院司諫(장례원시간), 司憲府臨製(사헌부임제)를 除搜(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박광조 < 朴光祖 >

陰城人(음성인), 벼슬은 承訓郞(승훈랑)에 그쳤으나 임진왜란 때 倡義(창의)하여 高敬命(고경명), 金千鎰(김천일) 막하에서 軍糧(군량)수송 部將(부장)으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