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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사행(使行) 2천리(千里)

임진왜란 때의 명장 권율(權慄)장군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재직 중에 있을 때의 일이다. 갑작스런 왜(倭)의 침입을 당하자 각지에서 들고 일어선 수천의 용병(勇兵)을 이끌고 전북일대와 호남 각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그 승전의 소식과 이곳 호남의 정세를 의주(義州)에 있는 임금에게 알려야만 하는데 왜적이 팔도(八道)에 가득하여 장계(狀啓)(임금에게의 보고서)를 전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 어린 정충신(鄭忠信)이 그 중대하고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어린것이… 하고 주위에서 말렸지만 그는 끝내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때는 삼복(三伏) 한더위였다. 행동이 민첩하고 지략이 뛰어난 정공은 온몸에 「옻칠」을 발라 나병환자(癩病患者)를 가장하고 왕에게 올릴 장계를 가늘게 노끈으로 꼬아 멜방(배낭)을 만들어 등에 지고 걸인행색(乞人行色)으로 먼길을 떠났다.

별로 배운 것은 없었지만 바탕이 영민(英敏)한 정공은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점」에도 능통하여 용하게 적진을 피해가다가 더러는 정탐을 위해 일부러 적진(敵陣)을 찾아들어 걸식을 하면서 밤낮으로 북행을 계속했다. 그래서 무사히 행궁(行宮)에 당도한 그는 메고간 멜방을 풀어 장문의 장계를 원상대로 만들어 왕에게 바치는데 성공을 했다.

이때 오성 이항복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선조왕(宣祖王)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정공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차린 이공은 정공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손수 글을 가르치니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물리(物理)에 대한 깨달음이 빨라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뛰어난 재간을 발휘했다. 정공의 상관이자 스승인 이항복은 일찍이 이런 말을 하여 정공을 극찬했다. 「정충신이 만약 칼을 버리고 책을 취하면 일대의 훌륭한 명사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그 해 겨울 무과(武科)에 급제한 정공은 1587년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전부대장이 되어 큰공을 세웠으며 그 후 승전(勝戰)을 거듭하여 포도대장(捕盜大將)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내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훌륭한 명신(名臣)이 되었다.」즉 광주광역시의 척추를 이룬 최대간선도로 금남로는 정충신공의 군호(君號)를 그대로 딴 것이다.